![[다정다감] 전주MBC 2025년 04월 20일](/uploads/contents/2025/04/35072e04eb35f9693b1133e4e576aa9a.jpg)
![[다정다감] 전주MBC 2025년 04월 20일](/uploads/contents/2025/04/35072e04eb35f9693b1133e4e576aa9a.jpg)
‘매 앞에 장사 없다!’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때리는 데는 꼼짝없이 굴복하게 된다 이런 의미의 속담입니다.
조선시대 중죄인을 추국하던 추국청에서는 매질에 견디다 못해 거짓 자백을 하고, 진술을 위조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인문클래스 시즌 3! 오늘은 조선시대 중죄인을 조사하고 판결한 내용을 모은 수사 재판 기록 ‘추안급국안’ 에 담긴 사건 매 앞에 장사 없었던, 조선시대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목서윤 아나운서]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온다라인문학센터와 함께 우리 주변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쉽고, 다양하게 즐기는 인문 클래스 시즌3!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문경득 HK연구교수님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문경득]
안녕하세요,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HK연구교수 문경득입니다. 이 자리에 오니까 상당히 긴장되네요. 저는 전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다가 대학은 서울로 진학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전주로 돌아와 석박사를 하면서 조선 후기의 반역사건을 주로 공부했습니다. 지금은 HK+연구단에서 개념사로 의리 같은 유교적 개념이 이렇게 변했는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전주가 고향이군요. 그래서 더 반갑습니다. 인문 클래스 시즌3! 2회를 채워주실 텐데요. 첫 번째 시간인 오늘은 어떤 이야기 나눠볼까요?
[문경득]
반란 사건입니다. 지난 시간에 변주승 교수님께서 [추안급국안]을 소개해주셨는데요, 기억나실까요? 그 책이 번역본이 90권이나 되는데요. 거기서 나오는 몇 개 사건을 다뤄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그중에 ‘매 앞에 장사 없다’라는 주제로 반역사건에서 나오는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진행자]
그렇군요 그 시절에 반란 사건, 그것을 기록한 것을 토대로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 같은데요. 반역과 거짓말 이야기! 뭔가 거창한데요? 어떤 사건인가요?
[문경득]
사실 그렇게 거창한 사건들은 아닙니다. 오늘 이야기는 차라리 거창한 사건에 휩쓸린 운 없고 억울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혹시 ‘무신란’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진행자]
무신란 이라면, 무신정변을 말하는 건가요?
[문경득]
아닙니다. 보통 고려 무신정변을 많이 떠올리는데, 여기서 무신은 무신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무신년에 일어난 반란이라는 뜻입니다. 정확히는 영조 4년, 1728년에 일어난 반란으로 보통 ‘이인좌의 난’이라고 알려져 있죠. 이 사건기록이 [추안급국안] 번역본으로만 7권쯤 됩니다. 500~ 60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으로 7권인데요. 이 사건은 전라도 말고도 경상도, 경기도, 충청도 등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그렇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이 무신란에 억울하게 휩쓸린 어느 영세상인에 관한 내용입니다.
[진행자]
지금까지 들은 내용만으로는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상상이 안 되는데요. 게다가 영세상인이 반란에 가담했다가 잘못 풀린 이야기일까요?
[문경득]
차라리 반란에 가담이라도 했으면 억울하다고 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실 반란도 아무나 일으킬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반란을 일으키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진행자]
일단 병력이 있어야 하고, 무기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문경득]
맞습니다. 먹는 것도 중요하니 식량도 있어야겠죠? 그래서 보통 반란은 그래도 권력도 있고 재산도 있는 사람들이 군대를 동원해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 같은 사건도 다 한양에서 대신들이 군대를 동원해 왕을 바꾼 사건들이죠. 물론 무신란은 이미 당쟁에서 밀려서 권력을 잃은 민간인이 되어버린 남인이나 소론이 사람들을 모아서 일으킨 반란이라 좀 특이하긴 합니다만. 아무튼, 영세상인이 주도적으로 끼어들기에는 반란이라는 판이 크지요. 비유하자면 박정희나 전두환이 쿠데타 일으킬 때 트럭 몰고 다니면서 생선 팔던 장사꾼도 가담했다고 하면 뜬금없죠?
[진행자]
그래서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더 궁금해집니다 비유하신 대로 생계를 위해 장사를 하는 장사꾼이 반란을 일으켰다? 교수님 말씀대로 뜬금없고, 생뚱맞다 이런 생각도 듭니다.
[문경득]
그렇죠. 강위징이 그런 장사꾼이었습니다. 장흥 사람으로 집이 가난해 호구지책으로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기준으로 하면 장사를 하는데, 가난하다는 게 이상할 수도 있는데, 조선시대 부자는 땅 부자입니다. 천석꾼, 만석꾼 하는 사람들이 부자였습니다. 자기 땅에서 쌀이 천포대, 만포대 나왔다는 거니까요. 강위징은 자기 농사지을 땅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충남 보령이나 해미까지 가서 청어를 사다가 장흥에서 되팔면서 살던 사람입니다. 다만 장사가 언제나 잘 되는 게 아니니까 형편이 어려울 때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면서 얻어먹으면서 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까 말씀드린 무신란에 엉뚱하게 얽히면서 추국청에 잡혀들어가게 됩니다.
[진행자]
추국청은 지난 시간에 변주승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셨는데요. 반역사건을 전담하는 특별재판을 말하죠?
[문경득]
네. 맞습니다. 반역범죄뿐만 아니라 강상범죄라는 패륜 사건을 전문적으로 조사하고 재판하는 특별한 임시관청입니다. 혹시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진행자]
봤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연출하고, 송강호씨가 주연을 맡았던, 장기 미제 사건으로 유명했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잖아요?
[문경득]
그렇죠. 지금은 고전 영화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데, 거기서도 연쇄살인범 잡으라고 주변의 압박을 받으니까 형사들이 동네 바보 같은 사람 잡아다가 범인으로 몰려고 하는 장면이 나왔죠? 그 영화가 유행할 당시, 개그콘서트에서 향숙이 말하는 바보 캐릭터가 나오기도 했었죠. 연쇄 살인사건도 그 정도인데 반역사건이면 어떻겠습니까? 장난 아니겠죠. 게다가 추국청은 기본적으로 때리면서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잡혀들어가면 어지간히 운이 좋지 않은 한 죽어 나오는 경우가 많은 곳입니다.
[진행자]
아! 그래서 매 앞에 장사 없다고 하신 거군요! 고문을 당하면 있는 말, 없는 말 다 지어내기는 하겠네요.
[문경득]
네. 아무래도 그렇죠. 단 지금은 고문이 불법이지만 이때는 합법이라 고신(拷訊), 형신(刑訊), 형문(刑問)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건 조선만 그런 게 아니고 근대 이전의 모든 나라에서 다 때리면서 조사했습니다. 오히려 조선이 얌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리면서 조사하는 규정이 다 있었거든요. 추국청의 경우에도 그때 쓰는 매의 규격이 정해져 있습니다.
[진행자]
매의 규격까지 정해져 있었나요? 매의 규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매의 이름도 따로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문경득]
추국청에서 사용하는 매를 추국신장 이라고 하는데요. 길이 109cm, 이중 손잡이 길이 47cm, 손잡이 지름 2.18cm입니다. 타격부 길이는 62cm, 너비 2.8cm이고 두께 1.24cm입니다. 조금 길고 넓적한 몽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변주승 교수님도 말씀하셨는데요. 이걸로 하루에 30대까지만 때리는 게 규칙입니다. 이 정도만 해도 사실 많이 아픕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잘못해서 곡괭이자루로 맞아본 적 있는데요.
[진행자]
어찌 보면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픈 추억을 말씀해 주셨는데요. 도대체 어떤 잘못을 하셨기에 곡괭이자루로 체벌을 받으셨어요. 많이 아프셨겠습니다.
[문경득]
20세기 말이라 그때는 그게 당연했던 시절이긴 합니다. 아무튼, 그때 20대에서 30대 사이로 맞았던 것 같은데 시커멓게 멍이 들었는데 그게 한 달을 가더라고요. 그런데 추국청의 조사는 하루 만에 끝나는 게 아닙니다. 열흘 동안 조사받으면 하루 30대씩 총 300대를 맞는 겁니다. 시퍼렇게 아니 시커멓게 멍든 엉덩이 위에 계속 또 맞아야 하는 거예요.
[진행자]
맞은 곳을 또 맞고, 멍든 곳이 또 멍들고 이걸 견딜 수 있었을까요?
[문경득]
이 정도 맞으면 아주 튼튼한 성인 남성도 대부분 죽습니다. 기록을 보면 보통 100대 넘어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목숨이 위태로워지더라고요. 이런 상황이 되면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심문자가 원하는 말을 지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혹여 버티다가 죽으면 그걸 ‘물고(物故)’라고 합니다. 이 경우에도 죽는 건 똑같은데 반역죄로 사형을 당하면 연좌라고 해서 일가친척까지 벌을 받는데, 물고를 당하면 그건 안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물고 당하면 연좌 안 당한다고 확답을 할 수 없는 건, 인조반정 이후 일어난 ‘이괄의 난’ 이후로 혐의가 확실하면 자백이 없어도 가족까지 연좌로 처벌할 수 있다는 사례가 생겼거든요.
[진행자]
아휴! 그렇게 고신? 형신? 을 당하면서 결국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겠네요.
[문경득]
네. 강위징은 6월 22일부터 7월 10일까지 약 11번 정도의 형신을 받으면서 234대를 맞았습니다. 엄청 고통스러웠겠죠. 그래서 결국 반란에 가담했다가 자백하고 말았습니다. 김수형, 이덕일, 정팔룡 등과 함께 반란을 준비했고 연락책으로 경기도와 변산 사이를 오갔다고 했습니다. 그 내용이 꽤 긴데, 그걸 간단히 정리하면 크게 다섯 가지입니다.
① 김수형 등은 반란을 위해 사사로이 배 10여 척을 만들었습니다.
② 그는 노비를 시켜 삼례역 앞에 있는 삼일장 장터에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등의 괘서(익명서)를 붙였습니다.
③ 여산 등지의 산에 올라가 큰 소리로 반란에 대해 외치게 했습니다.
④ 20년 전부터 병사를 양성했습니다.
⑤ 변산적(邊山賊)의 우두머리인 정 도령으로 추정되는 정팔룡(鄭八龍)이라는 자를 키워 냈습니다.
그리고 핵심인물인 정팔룡의 외모까지 상세히 묘사했습니다.
김수형은 원래 큰 부자였습니다. 그는 정팔룡이라는 자를 키워 냈는데, 그는 변산의 청림사靑林寺에 오고 갔으므로 이를 따서 ‘청림병靑林兵’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나이는 34세이고, 키는 조금 큰 편이었습니다. 검푸른 얼굴빛에 자줏빛 수염이 듬성듬성했습니다. 정팔룡의 얼굴 생김새는 이현의 얼굴 생김새와 자못 닮았습니다. 남소동南小洞의 말 방목장에 자주 와서 은밀히 묵었는데, 남산南山에서 아래로 내려가 왼쪽 세 번째 기와집에서 지냈습니다. … 그의 형인 정팔웅鄭八熊은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아주크며, 얼굴빛은 조금 누렇고 수염은 듬성듬성합니다. 키는 중간 키를 넘지 않습니다.
[진행자]
진술이 상당히 구체적이고 상세한데요. 이 정도면 사실이 아닌가요?
[문경득]
네. 진술이 워낙 그럴듯하다 보니까 믿기 쉬운데, 놀랍게도 거의 다 거짓말입니다. 제가 법학 쪽 논문도 찾아봤는데 진술이 상세하다고 해서 꼭 사실은 아니라고 합니다. 아무튼, 진술 중에 정팔룡이라는 이름부터가 예전에 ‘정여립의 난’ 때부터 사용되던 가명입니다. 이후 조선에 ‘목자망 전읍흥(木子亡奠邑興)’이라는 예언이 돌았는데, 목자는 이씨를 뜻하고 전읍은 정씨를 뜻합니다. 즉, 이씨 조선이 망하고 정씨가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후 정팔룡이라는 이름이 나름 반역자들 사이에서 ‘핫’했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무신란 당시에도 경기 지역의 정세윤과 경상도의 정희량이 각각 정팔룡을 자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강위징의 말에서 나오는 정팔룡은 거짓말입니다. 김수형이나 이덕일은 반란과 관련이 없었습니다.
[진행자]
그럼 강위징의 진술이 거짓말이라면 무신란 당시에 뭘 했나요?
[문경득]
일단 반란군은 아니고 오히려 반란을 토벌하는 의병에 참여했습니다. 물론 순수한 마음은 아니었다고 해요. 11번 형신 받는 도중에 의병에 참여하기는 했는데 혹시라도 반란군이 이길 것 같으면 바로 배신할 생각도 있었다고 자백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당시 청주성을 점령했던 반란군이 안성하고 죽산 쪽으로 올라오다가 관군에게 패했고, 강위징은 당시 수원에서 관군에 순순히 협력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들을 눈여겨본 군관이 평안 병사로 부임한 뒤에 불러서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진행자]
고것 참 기구하네요. 오히려 반란군 토벌에 참여했는데 반란군으로 몰리다니.
[문경득]
네. 그렇죠. 하필이면 조정에서는 변산적을 삼국지에 나오는 황건적이나 원나라 말기 홍건적처럼 나라를 뒤집으려는 세력으로 의심해서 집중수사하던 중이었습니다. 강위징은 떠돌면서 들은 이야기를 전했을 뿐인데 변산적 관계자로 오해되어서 11번이나 형신을 받았죠. 게다가 김수형하고 이덕일은 그냥 떠돌면서 빌어먹고 다니는 강위징을 좀 푸대접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형신을 당하다 보니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거짓말을 해버려서 잡혀 오게 된 거죠. 두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조정에서는 계속 때리면서 조사하다 보니 두 사람도 결국 물고 되고 말았습니다. 안타깝죠.
[진행자]
당하는 입장에선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우리가 알지는 못하지만, 역사 속에 그런 사례가 많습니까?
[문경득]
네. 제가 찾아보다가 놀랐는데, 고문을 하지 않는 요즘에도 압박을 받아서 거짓으로 자백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당장 아까 말씀드린 살인의 추억 진범이 2019년에 잡혔잖아요. 이춘재라고. 문제는 이춘재가 저지른 8차 사건은 이미 범인이 잡혀 감옥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지적장애와 신체장애가 있어서 범행능력이 부족했고 증거도 없었는데 수사당국에서 그냥 잡아넣은 거죠. 20년 넘게 잡혀있다가 진범이 잡혀서 겨우 풀려났습니다. 연쇄살인도 이 정도인데, 왕조 국가에서 왕위 계승하고 얽혀있거나 왕실 인물이 피해자가 되면 어땠을까요?
[진행자]
그 분위기는 상상만 해도 처절하네요. 심문당하는 사람도 고통스러웠겠지만, 심문하는 사람들도 목숨을 걸고 범인을 잡으려고 했겠네요.
[문경득]
심지어 범인이 없으면 만들기도 했습니다. 영조는 다들 아실 텐데요. 영조 바로 직전의 왕이 경종인데, 바로 유명한 장희빈의 아들입니다. 아무튼, 후계자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동생을 후계자로 삼았는데, 이게 좀 문제가 커지게 됩니다. 서인에서 노론하고 소론으로 갈라졌는데, 이때 노론에서 영조를 후계자로 만들려고 무리를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소론에서는 노론이 경종을 죽이려고 했다라고 고발을 합니다. 이것 때문에 노론에서 많이 죽습니다. 심지어 노론 4대신이라고 해서 지금으로 따지면 장관까지 한 고위관료거나 7~8선한 국회의원급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높은 양반들도 죽고 맙니다. 다행히 경종이 동생만큼은 지키려고 해서 영조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영조가 왕위에 오릅니다. 이 뒤에는 안 봐도 상상이 가시죠?
[진행자]
피바람이 불었겠군요?
[문경득]
당연히 그렇겠죠? 그때 주동했던 사람들이 다 잡혀 와서 조사받고 사형당하고 등등 그렇게 됩니다. 그 와중에 어떻게 허위자백을 만들어내는지도 나옵니다.
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진술을 바치면 살려 줄 뜻이 있다고 꼬드겨서 진술을 받고, 진술을 받은 뒤에는 그대로 결안을 만들어 처형했다.
② 자백한 진술을 먼저 써 두고 그 윗부분을 말아서 죄인이 알지 못하게 한 상태에서 죄인으로 하여금 강제로 서명하게 하여 결안을 만들고 처형했다.
③ 거의 죽게 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의 손바닥을 찍어 결안을 억지로 만들어냈다.
④ 진술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죄인을 잡아 오게 하면서 매질을 멈추겠다고 아뢰었는데, 그런 확인 절차 없이 곧바로 자백했다고 결안한 문서를 올리고 처형했다.
⑤ 이미 십여 차례 매질을 당하고 난 뒤라 전혀 의식이 없었는데도 자백 진술에는 자세한 사실이 적혀 있어, 거의 죽게 된 사람의 말이 아닌 경우도 있었다.
[진행자]
이런 기록들이 다 남아있군요. 여기서 결안이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요. 결안은 무엇인가요?
[문경득]
결안은 자백을 정리한 문서입니다. 지금처럼 DNA 분석 같은 기술이 없는 옛날에는 어느 나라나 자백이 필수였습니다. 조선도 마찬가지고요. 아무튼 그 결안이 필요하긴 한데 자백을 안 하니까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걸 가짜로 꾸며 내서 처형했습니다. 그때 옥사 당시의 아전과 나졸들도 체포해서 조사했는데 그 사람들은 바로 앞에서 매 맞다가 죽는 사람을 봤잖아요? 그래서 매를 때리려고 위협하자 바로 자백합니다. 그때 그렇게 진술 조작한 사례가 있었다고. 그렇게 영조는 나름 복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소론을 쫓아냈는데 노론 입장에서는 소론이 원수잖아요? 그래서 끝까지 처벌해야 한다고 상소하고 그러니까 영조 입장에서는 듣기 싫어서 노론을 다시 쫓아내고 소론을 불러들였습니다. 이러던 찰나에 무신란이 일어난 거죠.
[진행자]
이렇게 자세한 사연은 몰랐네요. 게다가 그게 무신란으로 이어지다니. 목숨뿐 아니라 왕위까지 걸려있으니 영조가 너그럽게 판결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긴 했겠네요?
[문경득]
네. 뭐라고 변호라도 하면 바로 ‘너도 역적이지?’라고 하면서 잡아 가둘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봐도 됩니다. 심지어 가족들도 어떻게든 구해줄 생각을 못했습니다. 오히려 독약을 들여보내면서 자살하라고 종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진행자]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끔찍한데요? 왜 그랬을까요? 가족이잖아요?
[문경득]
아까 잠깐 말씀드린 연좌 때문입니다. 반역죄 같은 범죄를 저지르면 그 가족까지도 처벌하는 제도입니다. 조선만 그런 건 아니고 중국은 더 심했고, 서양에도 다 있었습니다. 반란에 연루되어서 잡혀가다가 자백하게 되면 가족도 연좌가 됩니다. 나중에 거짓말로 밝혀져도 소용이 없지요. 그래서 반란을 일으키면 자기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풍비박산이 납니다. 그래서 연좌를 이유로 반란을 준비할 때 당당하게 가족을 끌어들이기도 했지요. 자백하면 연좌될 수 있으니까 가족 입장에서는 자백하기 전에 죽는 물고 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맞아 죽기 전에 너무 고통스러워서 거짓말로 자백이라도 하면 안 되니까, 독약을 넣어주는 겁니다. 실제로 영조 6년에 있었던 모반사건에서 그런 사례가 걸려서 기록이 있습니다.
[진행자]
지난 시간에 변주승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사건이군요. 그런데 교수님, 이런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왜 역사 교과서에선 안 나오나요?
[문경득]
죽고 죽이는 사건이 교육적이지 않아서가 아닐까요? 아무튼 영조 6년에 궁궐에서 저주 사건이 발각됩니다. 아까 말한 무신란의 잔당들이 뼛가루를 들여와서 궁궐에 묻어서 저주하고, 심지어 영조의 아들딸에게 먹이고, 환관을 끌어들여 방화까지 하려고 했던 사건입니다. 이 저주가 효과가 있었는지 영조의 세자가 어린 나이에 죽기도 했습니다.
[진행자]
궁궐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도 문제인데, 게다가 아들까지 죽다니, 영조 입장에서는 정말 화가 많이 났겠네요.
[문경득]
진짜 저주나 뼛가루가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조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했겠죠? 제대로 재판을 받을 거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그런지, 이 사건에서 여러 사람이 뇌물을 써서 독약을 몰래 들여보내서 스스로 죽었습니다. 박도창이라는 사람이 쓴 편지가 [추안급국안]에 있습니다.
내가 지금 앞으로 살지 못할 것 같다. 가족들은 잘 있어라. 지금 상태로는 형문을 오래 견디지 못할 것 같고 형문을 받으면 죽지 싶다. 그러니 집장방(執杖房)에 돈을 좀 집어 주었으면 하니, 상사동 집에 있는 돈 30냥과 정가(鄭哥)인지, 아니면 송가(宋哥)인지 아무튼 그 집에 있는 쌀을 돈으로 바꿔 1백 냥을 마련해 외지기 나장[外直羅將]에게 들여보내도록 하라. 그렇게 정채(情債, 뇌물)를 쓰면 매가 좀 가벼워질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차례 형문을 받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외지기 나장에게 돈을 주면 차라리 빨리 죽을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다. 돈을 넉넉히 옮겨다 마련해 두고 외지기 나장에게 들여보내면 나장이 분명 독약을 구해 줄 것이니, 반드시 모름지기 차근차근 실수 없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박도창이 독약을 먹고 죽었는데, 추국청에서 수상하게 여겨서 이걸 밝혀냅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연좌는 피하긴 했는데 관련자는 모두 조사받다가 물고되거나 처형되고 맙니다.
[진행자]
참 안타까운 이야기네요. 교수님 오늘 이야기를 들어보니, ‘매 앞에 장사 없다’ 이 제목이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문경득]
네.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들이지요. 문제는 아까 말한 이춘재연쇄살인사건 때문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것처럼 최근에도 이렇게 허위 자백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옛날 일, 남 일이 아닌 거죠.
[진행자]
맞습니다. 오늘은 ‘매 앞에 장사없다’ 라는 제목으로 [추안급국안]에 있는 사건 이야기를 나눠봤는데요. 흥미로운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어떤 이야기 나눠볼까요?
[문경득]
다음 시간에는 [추안급국안] 많은 사건 중에서 짧고 흥미로운 사건을 골라서 전해드리겠습니다.
[진행자]
교수님 다음 시간도 기대 하겠습니다.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온다라인문학센터와 함께 우리 주변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쉽고, 다양하게 즐기는 인문 클래스 시즌3! 오늘은 한국고전학연구소 문경득 HK연구교수님과 함께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