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그거 보리차였어요

전주에 사는 주부 곽지강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추운 겨울이 되면 시원한 수정과 생각나시지요?

설도 돌아오고 해서 수정과 속에 얽힌 저의 재밌는 옛날 얘기를 하나 할까 합니다.

 

결혼 1년차였을 때였어요

겨울이 다가오자 시골에 계신 시부모님께서 처음으로 저희집에 오시게 되었답니다.

 

저는 긴장된 마음으로 없는 음식솜씨지만 최선을 다해 반찬을 준비했지요.

소고기도 사고, 돼지고기도 사고, 그리고 싱싱한 생선, 나물도 샀답니다.

 

그런데 후식이 문제였어요

'뭘 준비하지?'

하고 골똘히 궁리하던 중

언젠가 시골에 갔을때 아버님이 술드신 다음날 수정과를 시원하게 드시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맞아! 수정과로 하자!'하고는 바로 만들 준비를 했습니다.

계피, 생강, 설탕 등을 준비해서 드디어 끓이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처음 끓여보는 것이라 도저히 맛이 잘 안나더군요

생강을 좀더 넣어보기도 하고, 계피를 더 넣어보기도 했는데도 도무지 맛이 잘 안나더라고요.

 

시부모님 도착할 시간은 다 되어가는데 맛은 안나고.. 걱정이더군요.

그래도 그냥 이정도면 됐다 싶어 거기까지만 만들고는 바로 유리병에 넣어 냉동실에 넣었습니다.

 

드디어 저녁무렵이 되자 시부모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참기름도 한병 싸시고, 검은콩, 깨, 고춧가루 등등을  한보따리 싸서 힘겹게 들고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여기에 보답할세라

일년에 한두번 쓰는 큰 상을 폈지요.

옆에선 남편이 열심히 도와주었습니다. 상도 닦고, 반찬도 나르고, 냉장고에서 반찬도 꺼내서 놓아주기도 하고 .. 참 이쁜짓을 많이 하더라고요.

 

저는 시부보님께서 좋아하시는 소고기국이랑 조기매운탕, 그리고 숙주나물 등으로 상을 차렸습니다.

 

밥상을 보신 우리 아버님! 입을 쩍 벌리신채

"야~ 잔칫집같구먼. 이걸 다 우리 애기가 준비했다냐? 허허허"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으쓱하면서도 약간은 쑥스러운 마음으로

"예 ~"대답을 했는데, 옆에 있던 남편이 "아버지! 수정과도 준비하는거같던데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정과 까지? 허허"

 

우리 식구는 아주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마쳤습니다.

아버님은 기분이 좋으셨는지 약주도 많이 드셨습니다.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

제가 야심차게 준비한 수정과를 대령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저는

"아버님~ 시원한 수정과 한잔 드리까요?" 라고 여쭸습니다.

아버님은 너무나 좋아하시면서

"니가 수정과까지 했냐~?   아  좋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으쓱한 마음으로 주방으로 가서 냉동실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냉동실에 넣어뒀던 수정과 유리병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다 싶어서 얼른 남편한테 물었지요

"자기야~ 여기 유리병 두개 있는 거 못봤어?"

"응 그거 냉장실로 옮겼는데"

남편은 혹시 그것이 깨질까봐 냉장실로 옮겨뒀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쁜 그릇에다가 갈색 톤이 은은히 나는 유리병을 꺼내어 한잔 가득 따라다가 아버님께 드렸지요.

 

아버님 아주 대견스러운 듯 "허허~"하시더니

웃으시면서 한모금을 쭈~욱~ 들이키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별 반응을 안보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

"아가 수정과 맛이 좀 어찌 밋밋허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예 제가 처음끓여보는 것이라서 맛이 좀 없을거에요..."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아버님

"응 그래~.." 하시고는 또 한모금을 쭈욱 들이키셨습니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

"근데 말여 아가  ....  다음에는 설탕을 쪼끔 더 치긴 쳐야쓰겄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어머님께서 얼른 아버님을 쿡 찌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참~ 이냥반은 .... 술드시더만 별얘기를 다허네요.  요즘 애들이 달게 먹간디요"라고 핀잔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버님

"음음!! .. .."하고는 헛기침만 하셨습니다.

 

저는 좀 부끄러웠습니다.

'맛이 완전 없진 않았는데.....'라고 생각하고는 

주무시는 아버님 어머님께

"아버님~ 수정과 냉장고에 더 있으니까요 아침에 일어나시면 드세요"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침이 되서 냉장고문을 열어봤더니

정말이지 두어잔은 더 드셨는지 유리병은 많이 줄어있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맛은 없어도 우리 아버님이 수정과는 참 잘드시네'라고 생각하면서 조금은 으쓱해졌습니다.

 

아침을 드신 시부모님을 터미널까지 배웅을 해드리고 저는 냉장고를 열었습니다.

'수정과가 대체 얼마나 맛이없길래 아버님이 밋밋하다고 하시지?' 하면서 유리병을 꺼낼려고 한 순간!

저는 그때 너무나 놀라고 말았습니다.

 

냉장고 맨 아랫칸에 유리병 두개가 고스란히 꽂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냉장고 중간에도 유리병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반절남았고 하나는 그대로였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집에 정수기가 없어서 보리차를 끓여먹었었는데

베란다에 놓아두었던 보리차를 남편이 어느새 유리병에 넣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나봅니다. 병 색깔은 같고요, 정말이지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설마 설마....'하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반절남은 유리병을 꺼내서 맛을 본 순간

정말 아버님 말씀대로 아무 맛도 없고 밋밋하고 달지도 않는 보리차였던것이었습니다.

 

그순간!!!!!!

아버님 얼굴이 마구 떠올랐습니다. 죄송스러워서 뵐수가 없을것만 같았고 어떻게 말로는 표현을 못할 심정이었습니다.

 

'아버님!! 죄송해서 어떡헌대요

아버님께서 드신것은 수정과가 아니라 보리차였네요'

 

지금까지도 우리 아버님은 이 사실을 모르신답니다.

그냥 까맣게 잊고 지내오셨지요

 

저는 말씀을 드린다 드린다 하면서도 너무 죄송하고 쑥스러워서 지금까지도 말씀을 못드렸습니다. 물론 남편께도 한마디 안했고요.

그냥 웃음만이 살짝 나오고 말더라고요

 

처음오신 시아버님께 수정과랍시고 맛도없는 보리차를 드렸으니

우리 아버님 그때 무슨 맛으로 수정과를 드셨을까요

 

이번 설에는 아버님게 꼭 말씀드릴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