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에 배산 입구에서 친구와 약속이 있어 원광여자고등학교 정문을 지나 배산쪽으로 갔다.
원여고인지 원여상인지는 몰라도 여고생들이 버스에 악기를 싣고 있었다.
아리따운 여고생들을 뒤로한 채 익산의 명산인 배산으로 몸을 옮겼다.
약속시간보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지나가던 차들도 구경하고, 바닥에 있던 돌맹이도 차가며 시간을 떼우고 있었다.
그런데 약속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친구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휴대폰을 집에 놓고 와서 친구에게 전화하기 위해 내가 왔던 길로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달리는 차가 없음을 확인한 나는 바쁘지도 않으면서 무단횡단을 하였고,
한참을 가다 뒤돌아 보니 원여고 후문 맞은편 횡단보드에는 할머니 한분이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 신호등은 신호등 옆에 있는 버튼을 누르고 한참을 기다려야 신호가 녹색불로 바뀌는데 할머니는 그것을 모르시는지 그냥 기다리고 있는것 같았다.
횡단보도를 한참 지나친 나로써는 갈등이 되었다.
'다시 돌아가 버튼을 누르고 가던 길을 갈 것인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말것인가?'
가던 길을 멈추고 그쪽만 돌아보던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맞은편에서 한 아가씨가 아래에서 위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뛰는 걸음걸이로 봐서는 무척 바쁜 모양이었다.
그 아가씨는 일단 버튼을 누르고 가쁜 숨을 고르고는 할머니에게 버튼의 사용법을 가르쳐 주는 듯 하였다.
약간 죄책감이 들기는 했지만 그 아가씨가 가던 길 중에 했던 좋은 일 중 하나로 생각하며 얼굴이 뜨거워 바쁘지도 않은 발걸음을 빨리 옮겼다.
원여고 정문을 지나 보이는 공중전화에서 친구에게 전화를 하니
친구는 약속을 잊었는지 이제서야 깬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친구는 미안해 하며 바로 나올것이라며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몇번이나 되풀이 했다.
무거운 발걸음을 떠벅떠벅 옮기고 있는데 아까 봤던 그 어여쁜 아가씨가 내쪽으로 뛰어왔다.
난 속으로 생각했다.
'왜 돌아서 왔지? 혹시 나 때문에??'라는 착각을 하고 있을 때 그녀가 나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올때부터 봤던 악기 실은 버스에서는 좀 마른 남자분이 나와 '정지연 선생'인지 '장지연 선생'인지라며 빨리 오라고 불렀다.
그녀가 차에 올라 타는것을 잠시나마 본 후에야 나는 생각했다.
할머니가 신호등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는 것을 본 아가씨는 위로 올라와 할머니와 같이 신호등을 건넌 후 다시 아래에 있는 학교 정문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결국 그날 친구는 늦게 왔지만 그 아가씨가 나에게 보여줬던 따스한 행동때문에 친구에게 크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날 한 나의 행동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그날을 난 "8월의 크리스마스"로 기억한다.
한명의 스크루지 영감이 잠시나마 산타크루스 아가씨에게 감명을 받은 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