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쳘어 봄을 맞이할 "설날"아침에

마음을 열어 봄을 맞이할 "설날"아침에 매일 그 날이 그날 같은데, 눈만 뜨면 보는 이 달의 달력에는 유난히 빨간 색깔로 옷을 입은 날들이 많습니다. 이것 뿐만은 아닙니다. 매일 아침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신문 속에는 민족의 명절이라며, 선물광고물들로 이미 설날 잔치 상을 깔아놓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언제부턴가 '마트'라고 고치어 쓴 우리 집 입구 골목, 아기자기한 이 구멍가게에도 작지만 예쁘게 포장한 선물세트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면서, 잠시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는 오늘 아침에 나는 무심코 이런 그림을 그렸습니다. "저 선물 하나가 내 누님 손이 주인이 되어 동생 나 왔어 하며 선 듯 마당에 들어서는 정겨울 내 누님의 모습!" 바로 그런 그림을 말입니다. 본시 매일 듣는 소리는 쉽게 질리고, 언제나 볼 수 있을 때는 그리움을 모르며, 어렵지 않게 손잡을 수 있을 때는 귀한 관계를 모르는 게 일상의 가족관이라고, 이웃을 끼워 넣어 단정지을 수 는 없지만, 이제는 내 몸을 아낌없이 주어서라도 피부치인 누님을 살려보겠다고 동분서주했던 지나간 나에 1년 ! 1년 전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가족애에 대한 열정은 쓰나미 만큼이나 너무나도 뜻밖에 들어 닥치었습니다. 우리 나라 5 60년대 대부분의 언니나 누님들에 생활들이 한 집안의 살림밑천 이였고, 동생들을 위한 삶 이였던 터라 그것을 극복하고 결혼을 해서, 20년이 넘도록 조카들과 오손도손 살고있으리라 믿었던 그 누님은, 어느 날 갑자기 홀로 살겠다고 전화가 왔을 때는, 홀로될 누님이 미운 것이 아니라 고단하게 살 누님의 삶이 싫어서 이혼만은 아니 된다고, 차라리 그럴려면 전화조차도 하지 말라고 해대고는 전화수화기를 놓아버린 것이 3년여.......... 그리고 지난해 꼭 이맘 때 누님소식을 받고 급히 택시를 대절해서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누님스스로의 삶에 지친 치명적인 뇌출혈로 식물인간이 된 채, 이미 가족으로서에 인연을 주고받을 수 없는 사이가 되어있었습니다. 그 동안 홀로된 누님 하나 살려보겠다고 문턱 밟듯이 서울에 있는 병원을 오가고, 형제로서의 오해 아닌 오해라도 꼭 풀어야한다며 어지간히 동동거려보았습니다. 가진 것은 몽땅 병원에 밀어 넣고도, 털털 털어버린 홀가분한 마음으로 때로는 생전처음 백일장마당에서 누님의 쾌유를 비는 마음을 뿌려도 보았는가하면, 혼이 되어서라도 전할 수 있을 까싶어서 전국방송에 동생이라는 내 속내를 표현해보기도 했지만, 아는지 모르는지 이대로 가면 너무나 서러울 내 누님은 여전히 병원 중환자 실을 당신 안방 삼아 잠만 잡니다. 꼬집어도 흔들어보아도 소리치어 불러도 단지 기적을 꿈꾸는 가족들의 기도는 한낱 실날 같은 희망일 뿐, 의학적으로는 이미 저 세상 삶을 사는 요즘 내 누님을 보면서 수없이 덮어 쓴 말이, 우리가 살아 숨쉬며 손 잡고 나눌 수 있을 때, 사랑도 우애도 서로 주고받음이 때늦지 않은 아름다운 애정이며, 어쩌면 미루다 후회하는 불확실한 미래의 간절함보다도, 더 빛나는 보여줌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 그래서 비록 나는 아닐지라도, 민족의 대 이동이라는 이 설날!! 내 울타리 밖의 모든 이웃들만이라도 끈끈한 가족사랑을 보듬어 안고 담아 나누는 돌아오는 1년의 에너지가 되었으면- 혹시라도 뒤돌아보아야될 형제나 자매라도 있다면 기꺼이 용서하고 손잡아 어깨동무하는 화해의 설날이 되었으면- 이것이 어쩌면 끝끝내 헤아리지 못한 내 누님과의 이승의 한이될지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나는 따듯한 밥 한 그릇 더 다정하게 옆에 퍼 놓고, 여전히 식물인간의 내 누님을 지달릴겁니다. 이번 웃음에 꽃이 필 설날에........... 전주시 덕진구 금암동700-7 이호선 (T: 251-2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