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훈장

 
    • 우리 민족 역사상 최대 비극이었던 6.25 사변이 일어났던 때도 어느듯 54년이나되었습니다. 같은 민족끼리 서로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어찌보면 강대국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 양상이었던 민족 상잔의 비극이 할키고 간 그 엄청난 비극의 후유증은 아직도 수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겨져 있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나던 해, 제 나이는 3살, 우리 아버지는 그 당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시고 육군 중위로 경기도 옹진군 전방 부대에서 복무 중이셨습니다. 그해 6월,25일, 우리 고모님 결혼식이 있었답니다. 맏며느리 울 어머님. 아버지는 나중에 오시기로하시고 , 혼자서 절 들쳐 업으시고 2일 전에 고향인 전라도로 내려오셨답니다. 만일 그 결혼식이 아니었으면 끊어진 한강 다리에 곧 적의 수중에 떨어진 그곳 옹진에서 어머니와 제 운명은 어찌되었을까요? 아마도 곧 군 장교 가족으로서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높았겠지요. 그 와중에 결혼했던 우리 고모님, 그 시대 상황에 맞물려 어려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허나 이게 바로 운명이란 건지.... 고모의 불행이 바로 저와 울 엄마를 살렸으니... 그후,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었을 지는 너무도 잘 아시는 일이고... 치열했던 전쟁 중에 남편을 전장에 내보내고 , 숙부님과 울 아버지 ,두 아들 전쟁터에 보내고 이미 혼이 다 빠져버리신 홀 시어머니와 5명의 어린 시동생, 그리고 어린 저까지 대가족 거느리고 머나먼 남쪽 부산까지 피난 떠나고 어려웠던 피난 살이에 그래도 단 한명의 가족도 잃지 않으시고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남편 기다리며 전쟁을 겪으셨던 그 당시 불과 23세의 나이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셨는 지 어머니의 그 강인하셨던 힘이 도데체 어디서 나왔을 지 참으로 존경스러웠습니다. 작년에 어머님 먼저 보내시며 그리도 섭게 우시며 그 고마움을 토로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새삼 다시 생각납니다 지금도 6.25참전 용사회 회장직을 맡아서 옛 참전 용사들과 활발한 모임을 계속하시는 모습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이제는 다들 노인이되신 분들께서 그 옛날 받으셨던 각종 무공 훈장을 가슴에 다시고 해마다 6.25 기념행사장에 참여하시며 다시는 이 땅에 민족 상잔의 비극은 없어야한다고 다짐을 하십니다. 이제 우리도 남과 북이 서로 화해의 장에 나와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습니다. 하루 빨리 과거의 어두웠던 기억들은 민족 화해라는 커다란 틀에서 서로가 용서하고 이번에는 통일을 위하여 다짐하는 6.25 행사가 되었으면좋겠습니다. 군산시 신영동 17-2 011-9912-5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