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외령 마을에 다녀와서

3-5big.jpg 집안전체에 머위대나물 냄새가 진동을 한다. 시골로 열무를 뽑으러 가지 않겠는냐는 옥자언니의 말에 나는 두말않고 오케이를 했다. 학교가는 작은놈에게 현관키를 쥐어 보내며 어쩌면 늦을지도 모르니 학교다녀와서 문단속 잘하고 있으라고 했더니 녀석은 하룻동안 엄마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인지 신이 난 모습이다. 아이가 가고 나는, 약속한 시간에 늦을까봐 부산을 떨어야 했다. 늘상 해 온 일인데 설겆이며 집안 청소가 더디다. 내 마음이 조급하다는 증거였다. 뜨거운 태양볕에 대비해서 썬크림도 듬푹 바르고 집을 나섰다. 사 십여분을 달려 약속 장소에 왔건만 만나기로 한 사람들이 안 보였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했더니 한 사람은 빨래를 널고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지금 오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한 시간여쯤 약속된 시간이 지나서야 우리는 차에 올랐다. 언젠가 가봤던 운암호 주변을 지나 우리는 순창으로 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창 밖 풍경은 아름다웠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촌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공기도 달랐다. 가슴 저 밑바닥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울창한 산림사이로 간간히 나타나는 들판엔 모가 심어진 논들이 보이고,한가로이 창공을 나는 새들도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정겨운 풍경이다. 잠시 옛 생각이 났다.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 오륙학년 때 쯤이었으라. 친구들 몇 명이 조를 짜서 모내기를 하러 다녔었다. 뻔한 시골살림이라 용돈이라도 벌어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길게는 가지 않았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의 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를 심기 보다는 장난치기 일쑤였고 새참이나 밝히는 뻔뻔한 가시나들이었다. 우리가 탄 차는 열 대섯가구쯤 되는 마을앞에 멈췄다. 옥자언니네 시댁마을인 순창 동계 상외령마을이라고 했다. 상외령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마을이었다. 나는 꼭 어린시절 뛰놀았던 고향마을에 온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 마음이 들뜨고 좋아서 어쩔줄을 몰랐다. 우리가 처음 옥자언니네 시댁어르신이 살고 계시는 집으로 들어 갔을때는 집안에 아무도 안 계셨다. 대문간에 커 다란 개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부지런히 눈망울을 굴렸다. 집안 여기저기 시골스런 멋이 가득 넘쳤다. 기외집조차 자연과 잘 어우러져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연상케했다.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장독대 옆 선인장 화분 몇 개. 살구나무 아래 잘 가꾸어진 작은 꽃밭. 그리고 토끼장으로 쓰였을 법한 작은 집. 어디를 봐도 옛스럽고 멋스런 풍경이었다. 마당 한켠에 수북히 쌓여있는 열무를 다듬고 있자니 옥자언니 시어른들께서 오셨다. 검게 그을린 시골 촌로 모습이었다. 우리들의 방문에 다소 놀라신 눈치셨지만 이내 편안하게 대해 주셨다. 옥자언니가 사 가지고 간 삽겹살을 구워 방금 뜯어온 상추와 땅 속 깊이 묻어 두었다가 꺼냈다는 깊은 맛의 묵은 김치, 머위대탕으로 맛난 점심을 먹었다. 정말 특별한 맛이었다. 조금 시장했던 탓도 있겠지만 어느것 하나 맛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커피 한 잔씩을 마시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열무를 다듬어 커다란 통에 간을 치고는 두 발 달린 손수레를 끌고 밭으로 갔다. 마을 앞 커다란 정자나무 아래 자리한 밭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상추. 마늘. 솔. 고추. 생강. 아욱 등등... 어머니는 낫으로 머위대를 베서 우리들에게 잎을 따라고 주셨다. 나는 그 새에 마늘을 뽑았다. 잠시도 쉬지않고 일하는 모습을 보고 옆에서 그런다. "미숙이 신바람났네. 넌 시골체질이구만." "그럼, 좋고말고." 물만난 고기처럼 방방뛰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는지 한마디씩 했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시골 어머니들은 아니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나눠 주시기를 잘 하신다더니 옥자언니 시어머니께서도 별반 다를게 없으셨다. 이젓저것 욕심껏 뜯어가라고 하셨다. 손수레 가득 싣고 집으로 오니 김치거리가 알맞게 숨이 죽어 있었다. 한쪽에선 고추를 갈고 한쪽에선 헹구고 바빴다. 시원스럽게 수돗물이 콸콸 쏟아지고 넓은 공간에서 일을 하니 살 맛이 났다. 비좁은 아파트에서 김치 한번 담그려면 이리저리 치우기 바쁜데 말이다. 김치는 옥자언니가 가지고 간 많은 통에 담고도 담아 비닐봉지에 담아 묵어야했다. 아마도 서 너집 식구가 한달동안 먹고도 남을만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어머니는 김치를 한 보시기만 남기고 모두 가져다 나눠 먹으라고 하셨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모두 주신 것이다. 마티즈차 트렁크가 꽉 차고 뒷좌석에까지 수북하게 실었다. 또 오라고 하시는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우리는 서둘러서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는데 어느새 시간이 저녁밥 지을 시간이 되었다. 집까지 가려면 족히 두시간은 넘게 걸릴텐데 나는 슬슬 조바심이 났다. 남편의 퇴근시간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이런 내 맘을 알았는지 옥자언니가 속력을 더해 달렸다. 무사히 전주에 도착하였다. 옥자언니는 얼른 가라면서 김치며 상추. 머위대. 가죽나물 말린 것등을 내 차에 실어 주었다.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전주에서 익산으로 오는데 평소때보다는 시간이 더 걸렸다. 집에 도착하니 저녁 여덟시쯤이었다. 큰 애에게 쌀을 씻어 놓으라고 부탁을 해 놓았지만 맘이 바빴다. 내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남편은 컴퓨터 바둑을 두고 있었다. 힐끔 쳐다보는 눈길이 곱지 않았지만 나는 무서울게 없었다. 먹을 것을 이만큼 들고 왔는데, 설마 늦게 왔다고 뭐라고는 않을테지 속으로 베짱 두둑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서둘러 저녁상을 차렸다. 상외령마을에서 담가 온 열무김치와 배추김치. 상외령표 상추로 입이 터지게 상추쌈을 하였다. 남편도 아이들도 맛있다며 잘 먹어주니 행복이 따로 있을소냐. ........... 하루가 지나서 쓰니 제 맛이 안 난다. 생각이 잘 떠오르질 않아 제대로 표현을 못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좋은 인연이 있어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함께 하였다는 것에 대해 눈물겹도록 행복하다. 나에게 고향의 정취를 느끼게 해 주고, 조건없이 나눠주고 베풀어 준 옥자언니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앞으로도 좋은 인연으로 언니 동생하며 오래 오래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살을 나눈 친자매보다도 진한 사랑을 나눈 언니와 동생이 되고 싶다. 이제 슬슬 삶아논 머위대 껍질를 벗겨야겠다. 2004. 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