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가족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어버이날 하루전, 고향에 홀로 계신 친정어머니를 찾아 뵙고 고추모종 옮기는걸 도와드리고 오자며 남편과 함께 출발을 한후 어머니 휴대전화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하필 그날 큰이모님댁에 계시는데, 오후에 돌아오신다는 말씀에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하다가 마침 춘향제가 열리고 있다는걸 떠올리면서 모처럼 구경하자 싶어 가던길을 재촉했습니다.
"요천수 맑은물에 노을만 타고 지고
아~~ 춘향 춘향 겨레의 사랑이여
전라도라 남원땅에 영원하신 사랑이여."
막 남원시내에 접어들자 "제74회 춘향제"를 알리는 대형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고, 늘 차만 타면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조느라 침묵을 지키기가 일쑤였던, 내 입에서 갑자기 노래가 흥얼거려 지는겁니다.
"당신 무슨노래를 하는거야."
"으, 춘향의 노랜데 남원에 오니까 저절로 나오네."
노래 제목을 알려 주면서 남원여중을 다니던 시절(1973-1975년) 음력 4월 8일이 되면 사월초파일 행사와 춘향제를 함께 했는데, 우리학생들이 전야제 행사때 등불행렬을 했고, 개회식에 가장행렬 참여 했던때를 추억하며 그때 배웠던 노래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색깔 고운 한복이 없던 시절 장롱지기로 간직되어 있던 어머니 외출용 한복을 얻어입고 청사초롱을 들고 춘향가를 부르면서 남원군민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다리 아픈것도 참아 가며 등불행렬을 하던 추억, 따갑게 내리쬐는 초여름 같은 날씨에 가장행렬을 했던 추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그때 불렀던 노래였던 '춘향의노래' 후미부분을 한번 더 소리 높여 불러봤습니다.
"축제를 어디서 하는데?"
"나도 잘 몰라 광한루쪽으로 가보게."
살아오면서 늘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남원이요'하고 자랑스럽게 말하던 나인데 무심하게도 그동안 전국규모의 축제인 '춘향제'를 언30년만에 구경하게 되어 마치 타지에서 온 관광객처럼 우리는 무척 낯설어했습니다.
줄지어 서있는 주차차량 뒷줄에 차를 세우고 요천뚝위로 올라서니 축제현장이 한눈에 쫙 들어오는데 행사장 천막행렬이 끝이 안보이는겁니다.
먼저 우리 발걸음을 잡아 끄는데는 "허브엑스포"현장이였습니다.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로즈마리' 허브 미니화분도 하나 사고 무료로 나눠주는 '글라디오러스'꽃씨(뿌리)도 받고, 돌아나오다가 즉석 인절미 무료시식도 하고 친정엄마 드릴 몫으로 인절미를 사들고 빠져 나왔더니 본격적인 춘향축제 현장과 연결이 되더군요.
"야! 축제가 보통 규모가 아닌데....."
연신 감탄사를 연발할 수 밖에 없던 남편과 나는 잘왔다는 표정을 주고 받았습니다.
요천변에 특설무대는 춘향선발대회를 마치고 축제의 말미를 알리는 듯, 벌써 해체를 시작하고 있었고, 각설이 놀이패의 흥겨운 풍악소리가 연로하신 어르신들의 발걸음을 묶어 놓고 있었습니다.
"저 다리 좀 봐. 승사교 다리일텐데, 분수도 있고 겁나게 멋있어졌네."
중학생때 승사교를 넘어 소풍가던 기억이 있어 아는척하면서 다리옆으로 다가가 물줄기로 시원한 터널을 만들고 있는 다리위를 통과해서 살펴보니 그곳은 언제 새로 생긴 "승월교"였고, 기억하고 있던 승사교는 저 아래쪽에 건재해 있더군요.
아무리 캐내도 없어지지 않는 아카시아나무 잔뿌리처럼 늘 고향에 뿌리를 댄채 내고향이 남원임을 자랑하던 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지름길을 찾아 고향집만 살짝 살짝 다녀가곤 하던 사이 이렇게 발전된 고향의 모습에 감탄했고 축제를 성대히 이끌고 계시는 고향분들게 감사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카네이센과 저녁찬거리를 몇가지 사서 싣고 고향집에 도착해 보니 그새 어머니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철부지 어린애마냥 춘향제를 구경하고 온 이야기를 새삼스럽다는 듯이 늘어놓자, 그새 봄볕에 검게 그을리신 어머니께서는 축제 첫날 다녀오셨다면서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큰딸 즐거워하는 표정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딸의 이야기 들어주셨습니다.
오랫만에 내 고향과 고향집을 다녀와서 남원시 홈페이지에 올라있는 춘향의 노래 악보를 찾아 노래도 해봤고, 얻어온 핑크색 꽃이 필 글라디오러스를 화분에 심어 베란다에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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