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방송을 아느냐?

이 남식부장님을 비롯 윤 승희님 조 형곤님 김 난수님 이 주영작가. 류 선희리포터 모두 안녕하신지요? 여성시대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애청하고 있습니다. 여성시대에 편지글은 1년에 두어번만 쓰려다 몇년전 이맘때의 일이 생각나서 적어 볼까 합니다. 전주에사는 우리 마을이 처가집인 사람이 텔레비젼 뉴스에 잠깐 나온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전주 mbc뉴스에 나와 한이야기는 "여기는 시도 때도 없이 정체구간이구만요" 불과 몇초간 화면에 나왔는데 노채마을에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려, 경호매형이 테레비에 나왔더만" "나도 봤지" 몇일간은 시골마을의 화잿거리였고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부가 모 방송국의 TV프로에 출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몇일전부터 잠도 오지 않고 방송국 말만들어도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생방송 그날은 4대의 카메라가 맹수의 눈처럼 가까이 왔다가 멀어지고 혼을 다 빼놓았습니다. 평소에 침착하고 말도 조리있게 하던 아내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 였습니다. 집으로 오는 차안에서 아내는 이 말을 해야지 하고 생각 하는동안 이미 입은 다른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방송 끝나고 내가 담당 PD에게 내가 사는마을은 진안군의 장수마을이고 귀농한 젊은이들이 많은 곳으로 농촌프로그램 <6시 내고향> 촬영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후 잊고 있었는데 6시 내고향 작가로 부터 5월 8일 어버이날 특집방송으로 우리 마을을 촬영하려 오겠다며 깜짝 이벤트를 마을에서 준비 해 보란다. 마침 매년 5월 6일 노채마을의 날로 정해 놓고 남녀 노소 마을 잔치를 하고 하루를 노는 날이라 좋았다. 마을 이장님을 찾아가 말씀드리니 그래도 자네가 방송출연 경험이 있으니 내가 준비 해 보란다. 그밖의 준비등은 저녁에 마을회의를 열어 상의 해보자고 한다. 나는 내가 작가라도 된것처럼 이벤트를 두가지 생각하고 실행에 들어같다. 경북 경산에 사는 친구 선태에게 전화를 했다. 선태는 어릴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몸이 아픈 아버지와 여 동생을 돌보고 밥하고 빨래하며 4KM가 넘는 길을 결석한번 하지 않고 걸어 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대견하다며 제사라도 지낸 다음날은 데려다 식사를 함께하고 그리고 보리쌀이나 밀가루를 싸 주웠다.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 가서 한공장에서 15년을 있다가 몇년전에는 쌀포대 만드는 공장을 차렸다고 고향에 어른님들에게 해마다 몇십만원씩 보내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몇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고 했다. 이곳에도 어려운 학생이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하라는 그다. 그에게 방송출연을 하라고 하니 절대 하지 않겠단다. 그럼 마을잔치가 있으니 오라고 하니 마을에는 온다고 한다. 두번째 계획은 86세 되신 혼자 사시는 할머니를 이장님이 모시고 외출하고 마을사람들이 텃밭에 비닐을 씌우고 고추묘종을 심고 방에 도배를 하고 무너진 흙담을 쌓기로 하고 저녁 마을회의에 참여했다. TV촬영을 나온다는 말에 모두가 신기하고 들뜬기분이었다. 주민모두가 PD고 작가였다.마을에서 연세가 가장많은 97세 할머니를 한컷 찍어야 된다는 사람,깊은 계곡의 가재와 버들치를 찍어야 된다는 사람,흑돼지 잡는장면을 찍어야 된다는 사람, 가마솥에 장작불로 밥하는 장면과 고사리 채취하는 모습을 찍자는 사람.모두가 한마디씩 했다. 그때 40대 중반의 한 사람이 "내가 들은 이야기인데 방송국사람들이 좋은 화면을 찍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열번이고 20번이고 계속연습을 시켜 초 죽음으로 만든다음 우리의 생각을 포기하게 한 다음 나 잡아먹어라"할때 진짜로 찍는다는 말에 모두가 겁을 먹었다. 이장님이 "그려 어디 쉬인일이있것어,하지만 하루 고생하자고 한사람 한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일 몇명이서 읍내에 장보기하려 가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다음날 방송국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갑자기 어버이날 특집방송이 취소되어 촬영을 오지 않겠다는 것이다.머리가 멍해지며 어느것이 현실인지 꿈을 꾸고 있는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정녕 너희가 방송을 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