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의자

안녕하세요. 여성시대를 진행하는 조형곤, 윤승희님!! 가을의 깊어가는 들녘 이곳저곳에선 한해 농부의 노력에 보답이나 하듯 저나다 곡식이며, 농작물들이 알알이 익어만 가건만... 벌써 넉달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인잃은 물건들은 하나같이 시간의 경과속에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며 먼지만 뿌옇게 뿌옇게 쌓여만갑니다. 세면장의 듬성듬성 묻어있는 낡은 면도기, 쇼파옆 구석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재털이, 그리고 돌보지않아 자꾸만 시들어가는 현관앞 화초들... 집안 구석구석 챙기다보면 아버지를 필요로하는 많은 물건들이 있겠지만 유독 아버지의 손때가 가장많이 묻어있는 물건들이 처량하게 갈곳잃어 헤메고 있는것 같습니다. 아버진 참으로 강건하신 분이셨습니다. 저희 5형제를 키우시며 그 흔하디 흔한 유행가 한번 콧노래로 부르시지않고 자식위해 부던히도 열심히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이제 그 5형제가 모두 장성하여 각자 자리잡고 살림좀 펴려할즈음 아버진 당신의 책임을 모두 다했다는 듯 어느날 갑자기 '식도암'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으시곤 넉달째 병원에서 투병중이십니다. 그렇게 강인하시던 분은 더이상 예전의 저의 아버지가 아니셨습니다. 강인한 어깨는 초췌하기 그지없이 앙상한 뼈만 튀어나와 있고 칠십을 바라보시는 나이에도 아침저녁으로 산행을 하시던 튼튼한 다리는 이제 혼자 힘으론 도저히 일으켜 세우질 못하는 신세가 되셨습니다. 그렇게 강건하고 재미없으셨던 아버진 막둥이인 저에겐 유달리 인자하셨던 걸로 기억이 됩니다. 1980년대 초 농촌에선 놀이공원에 간다는것은 참으로 상상하기 힘들었고 사치였던 시대었죠,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제가 초등학교 6학년 아마 5월5일 어린이날이었던것 같습니다. 이른아침 아버지는 뜬금없이 저와함께 털털거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낯선 미지의세계 '놀이동산'에 놀러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너무 좋아 반쯤 벌린입으로 연신 감탄을 자아내고 있었고 아버지는 조용히 옆에서 저의 좋아하는 모습에 흐뭇해지셨는지 너스레 웃음을 지으시곤 놀이기구에 다가가셔서 이것저것 골라 태워주셨지요. 그때 제일 기억에 남는 놀이기구는 큰원처럼 생긴것이 천천히 시계방향으로 도는것이었는데 제가 가장높은곳에 올랐을때까지 땅아래 개미만한 모습으로 서계신 아버지는 자식의 행복한 모습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시려는듯 그렇게 오래오래 서계셨지요. 전 그때까지도 아버지가 너무 어려워 이것 태워달라, 저것 태워달라 말한번 하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새로운 면모를 처음으로 느껴보았습니다. 제가 중학교땐 농촌애들이 대부분 그러하겠지만 저 또한 방학이 되면 어디 놀러갈 생각 꿈에도 못꾸고 그저 농사일 거들기에 온힘을 쏟을 형편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담배 농사일은 참으로 하기 싫은 일이었죠, 그 뜨거운 여름날 건조장(비닐하우스)안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담배고랑에 쭈그려 앉아 따오신 담배잎을 새끼로 엮는 일인데 너무 일이 하기 싫어 낫으로 장난을 치다 그만 손을 베었는데 아버진 어느결에 저의 곁에 오셔서 주위의 마른 담배잎을 불에 태워 재를 만든후 그 재를 저의 상처부위에 올려 놓으시며 입김을 불어 넣으시곤 비닐로 칭칭 동여매어주시는 거였습니다. 저는 그때 아픈것은 고사하고 아버지의 따뜻한 입김에 금방이라도 취해버린듯 마음이 금새 평안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가타부타 아무말씀없으시더니 "이녀석 일하기 싫은가 보구나, 그럼 잠깐 쉴겸 아버지가 목이 마르니 가게집가서 막걸리나 한사발 받아 오너라"하셔서 저는 일은 안하고 밭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가게집까지 콧노래 부르면서 천천히 걸어가며 힘든 일에서 잠시나마 해방을 맛봤던 기억이 납니다. 고등학교 다닐적엔 집에서 학교까지 십리정도 되었는데 항상 아침잠이 모자라 5분만 더자야지, 5분만 더자야지 하다 결국 어느날 버스시간이 늦은것 같아 아침밥도 거른체 후다닥 가방만 챙겨서 버스는 간신히 탔는데 아뿔싸 도시락을 놓고 온거였습니다. 1교시, 2교시, 3교시, 시간은 자꾸 가는데 수업중에 무서운 교련선생님이 교실 앞문을 스르륵 열고 나타나 "여기 정채영이라고 있냐?하셔서 제가 어안이 벙벙하여 "전데요"라고 하니 절보고 대뜸 "너 교무실로 따라와라"하시길래 저는 무슨 잘못을 단단히 한것같아 주눅이 들어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교련선생님이 저에게 하얀 보따리를 주시며 "아까 너희 아버님이 다녀가셨다, 네가 아침 도시락을 가져가지않아 걱정이 돼셔서 농사일도 접어두고 부리나케 가져오셨다는구나"하시며 그 하얀 보자기를 저에게 건네는거였습니다. 그토록 체면차리시고 권위주위적이신 분, 가부장적인 그 분, 말없으신 그 분, 저는 그제서야 진정으로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끊없는 사랑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항상 말은 없으셔도 자식을 위하는 마음은 바다와 같다는것을... 세월이 흘러 이제 저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있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사랑을 나의 자식에게도 똑같이 베푸려고 노력하지만 그 사랑만큼 쫒아갈지는 의문입니다. 아버지!!!, 자식사랑은 조건없는 사랑이라죠?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효도 조건없는 것이겠죠? 이제 수술도 다행히 잘 되었다고 하니 이제 아무걱정 마시고 자식들 어려워 마시고 어디 불편하시면 아프다고 엄살도 부리세요. 세월앞에 장사없다는 말 빈말 아닌것 잘 아시죠? 저희 자식뿐 아니고 집안의 하찮은 물건들도 아버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니 이제 훌훌 털고 일어서셔서 예전처럼 산행도 다니시고 내년 칠순잔치땐 여태껏 한번도 들어보지못한 아버지의 노랫가락좀 듣고싶네요. 항상 건강하세요. 정채영 충남 청양군 정산면 서정리 18 011-9217-3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