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제가 흰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사랑하며 살겠노라고 큰 목소리로 맹세하고 살아 온 세월이 어~~~언 17년.
그동안 이런저런 부딪힘으로 다투기를 수도 없이 해왔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저는 남편을 무지무지 크게 오해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몹시 서운해 했고 저는 또 당신이 어쩌면 그럴수가 있느냐며 맹공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둘이는 결혼 후 처음으로 길고 긴 실갱이가 시작됐습니다.
참으로 고달픈 신경전을 벌이면서 갈수록 감정의 골은 깊어져만 갔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남편은 술이 잔득 취해서 새벽녘에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남편은 방한가운데 털썩 주저앉더니 다짜고짜 "꺼~~~이 꺼~~~이"소리 내어 울며 말했습니다.
"마누라. 나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는 줄 알어?
마누라는 새끼들만 처다보고 살지, 나는 죽인지 밥인지도 모르고 마누라가 어디 날 한번이라도 처다보기나 했어?
이 마누라야. 내가 얼마나 쓸쓸했는지 아냐구? 내가 왜 사는지 나도 잘 모르겄다" 하더니 푸~욱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연신 독한 술냄새를 품어대며 잠이 든 남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참 기가 코가 다 막혀 오더군요.
글쎄, 외로웠다네요.
무엇이 도대체 남편을 이토록 외롭게 만들었는지 저는 한참동안 멍하니 천장만 처다보며 생각했습니다.
유달리 잔정이 많은 남편은 가끔 뜬금없이 " 각시야! 각시는 아직도 이 남편을 사랑하기는 하는거냐?"라고 물어왔지요.
그때 눈치코치도 없는 저는 "아이고 이 남자야. 이 나이에 무슨 사랑 타령이야? 우리가 지금 이십댄줄 알어?"라며 한 대 쥐어박는 소리를 했었습니다.
또 가끔 대문 앞에서 전화를 걸어 "각시야! 여기 집앞인데 좀 나올래?"라고 할때는 "밥해 놨어. 빨리 들어 와 밥이나 먹지 않고 왜 사람은 자꾸 오라가라 하는거야. 좋은 말 할때 빨리 들어와 밥 먹어"라며 전화를 툭 하고 끊었더랬습니다.
남편은 코를 석자나 빠트리고 들어 와 아무 말 없이 잠이 들곤 했지요.
그때사 외롭다고 꺼~~이 꺼~~이 거리며 울던 남편이 기가막히기도 하고 미웁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 되면서, 잠든 남편의 얼굴에서 개구쟁이 골목대장 사내아이의 얼굴을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퍼~~~억 하고 쉬인 웃음 소리가 새어나오고 말더군요.
그리고
오늘.
하얀 편지지에 또박또박 써내려간 낯익은 글씨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결혼 후 처음으로 받아 본 남편의 편지는 깊어만 가던 저의 감정의 골을 순식간에 메꾸어 버리는 마법의 요술 편지였습니다.
"각시야! 내 각시가 날 의심하고 믿어 주지 않아서 이 남편이 얼마나 속이 상했는 줄 알어?
나 항상 우리 각시한테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각시는 아마 모를거다.
각시와 내가 한배를 타고 때로는 바위에 부딪히고 흔들리기도 했지만 이렇게 아이들 건강하고 각시도 건강하고 모두모두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각시야!
우리 앞으로 싸우지 말고 서로서로 위해주며 행복하게 살자.
나 앞으로도 계속 우리 각시만 사랑하며 열심히 살게.
각시야. 마누라야.
근데 앞으로 나한테도 신경 좀 더 많이 써주면 진짜 진짜 좋겄다.
우리 각시 사랑하는 신랑이......
저는 남편이 보내 온 싱거우리 만치 짧은 편지를 읽으면서 마음의 답장을 썼습니다.
"남편아! 이 각시도 '이하동문'이야"
저는 남편과는 사뭇 다르게 감정표현이 인색하고, 애교라고는 눈 씻고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 없는 여자인지라 다음날 남편을 만나면 과연 지금 그대로의 감정을 전해 줄 수 있을지 사실은 자신이 없습니다.
아마도 또 그러하겠지요.
" 이 철딱서니 없는 신랑아. 사랑한다는 말을 꼭 해야만 알어? 이제는 눈빛만 보아도 눈치 코치 다 알아 챌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라며 분명히 또 한바탕 쥐어 박는 소릴하고 말겁니다.
남편의 편지를 받은
오늘은
시부모님 모시랴 아이들 챙기랴 눈코 뜰사이 없이 바쁘게 살아 오면서 남편을 믿음이란 이름 아래 무관심으로 일관해 왔던 제 자신을 반성해 봅니다.
말로만 듣던 40대의 안일과 그리고 위기를 눈물나도록 경험했습니다.
이제는
처음 남편을 만나던 그 짜릿한 열정이 아닌, 중년으로의 또 다른 애정의 성을 하나 둘 씩 쌓아가야 될까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