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앓이

일찍 혼자 된 동서 전화 연락을 받고 며칠 전 대전에 있는 국립 현충원에 갔었다. 오후 3시에 두 아들을 데리고 서울에서 내려온 것이다. 그곳 장교 묘역에는 고인의 5주년 추모행사를 하기 위해 군 장교들과 가족들 30여 명이 미리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하게 추모행사를 마치고 동서는 내 어깨에 매달려 참았던 긴 울음을 터트려 일행들도 슬픔을 감추지 못했었다. 지금 살아 있다면 중령의 의젓한 모습일텐데..... 해군사관학교 38기 동기생들의 연중 추모 행사다. 6년 전에 시동생은 대장암 선고를 받고 수술을 했었다. 그 후 6개월만에 간암으로 전위가 되어 다시 수술을 하였지만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39세 칠월에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두 살 아래 시동생이지만 친구처럼 지냈었고 특별히 그와 더 친했던 것은 투병생활을 하면서부터다. 암 말기선고를 받고 부대에서 전역을 하고, 건강을 찾으려 공기 좋은 이곳 전주에 내려왔었다. 날마다 함께 등산을 다니며 암치료에 좋다는 약초를 캐서 저녁내 달여 아침이면 병에 넣어 하루종일 물 대신 마시며 공해로부터 벗어나 자연과 함께 하는 모처럼의 여유시간을 많이 가졌었다. 고구마, 감자를 삶아 점심대용으로 먹고 전주에서 가까운 산은 거의 그렇게 매일 다녔었다. 그러나 백 약이 무효라고 했던가. 애쓴 보람도 없이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6월 한 달을 병원에서 지냈다. 오라는 전갈을 받고 서울병원으로 갔었는데 그때는 이미 실명이 되어 사람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며 조금이라도 눈이 보일 때 형수님 모습보고 싶었는데 왜 이제 왔느냐며 내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었다. 마침 식사시간이 되었는데 밥을 먹여 달라고 했었다. "형수님이 밥 먹여주니까 참 맛있다" 하며 형수님은 내 친구고, 누나고, 울 엄마 하며 빙긋 웃던 모습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일주일만에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도착했지만..... 소생하지 못하고 그렇게 먼저 가버렸다. 마지막 가는길에도 나를 애타게 찾았다는 가족들의 말에 더 가슴이 아려온다. 나는 아직도 아카시아 활짝 핀 오월이면 심한 가슴앓이를 한다. 이젠 마음속에서 지워질만도 한데 계절병처럼 울컥 보고싶은 마음이 앞서면 차를 몰고 대전에 간다. 싸늘한 묘비에 이름석자만이 반길 뿐, 그래도 무언의 대화를 하고 한참 머물다 돌아오면 가슴앓이가 조금은 가라앉는다. 언제나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