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갑내기 우리 남편은 요. 한마디로 '과묵' 합니다.
하루종일 같이 있어도 "재털이 come in", "밥 먹자", "불꺼라" 세 마디에 해가 저뭅니다.
연예 시절에는 그 '과묵'이 진짜 어마어마하게 품위 있어 보이고 가을 남자처럼 분위기 있어 보여 '사랑한다'는 말 한번 못 듣고도 무작정 한 이불을 덮었는데 살아보니 참 그게 아니더군요.
주말이면 어째 집안 공기가 한겨울 절간처럼 적막해서 분위기 좀 띄워 보려고 닭살 돋는 이야기를 할라치면 "되았어. 재방송이여"라며 채 본론에 들어가 보기도 전에 입을 다물고 말지요.
그런 남자가 술이 한잔 들어갔다 하면 "이 남자가 내 남편 맞어?"할 정도로 돌변해 버리고 만답니다. 직원들과 회식이 있는 날에도 미리 전화 한 통 하지 않다가 소주 반병 정도가 위로 들어갈 때부터 전화를 걸기 시작합니다.
(소주 반병 마시고. 상태: 기분 UP) 따르르릉~~~~~~
"어이~~~~ 미스 리(결혼 후에도 '미스 리'라고 부름). 시방 부장님이랑 한 잔 하고 있걸랑. 나 싸게 끝내고 갈겨. 미스 리. 사랑 혀. 내가 올매나 미스 리 사랑 혀는 지 알지? 부터 사건은 시작됩니다.
또 30분 후 (소주 한 병 마시고. 상태: 아리딸딸)
따르르릉~~~~~~~~~
"어이~~~~미스 리. 꺼~~~억. 나 시방 어디~~~~ 게? 화장실~~~이지.. 미스 리는 뭐 허고 있어? 싸게 갈려는 디 잘 안댜~~~아. 이 남편 쪼께 더 있다 갈겨. 사랑 혀 미스 리"
또 30분 후 (소주 한 병 반 마시고. 상태: 횡설수설 더하기 수다 절정)
"어~~~~이. 미스 리. 꺼~~``어~~~~억~~~. 시방 몇 시여? 나 싸게 갈려는 디 우리 부장 왜 그런 다냐~~~아. 꺼~~어~~억. 술 꺽으러 왔으믄 그냥 꺽으믄 되아지 왼 아가씨냐 구~~~~우. 부장 짜~~아~~~썩. 인간성 바닥 난당 게. 시방 여기가 어디냐고? 화장실 변기 위지 어디 기~~~이~~~인. 나 말여 누가 뭐래도 우리 미스 리여~~~ 조용필 '일편단심 민들레' 알쟈? 사랑 혀 미스 리. 나 싸게 들어 갈겨~~~어"
잠시 후.(소주 두 병 마시고. 상태: 언문 구사 불능)
따르릉~~~~~~ "어이. 푸~~~우~~~우. 꺽. 미수 리. 지굼 갈~~ 구
계산 중~~~야. 나 싸게 강당. 알 럽 뷰~~~~우. 퓨~~우~~~우"
저녁 12시. (아이들 모두 눈 부비고 일어난다) 따르릉~~~~~~
"미수 리. 나야~~~~아. 아~~ 끌~~씨. 부장이 2차 가자고 허네~~~에. 이따 또 전화 건다~~~아.
그 후로도 2차 어디어디로 와 있다, 뭘 먹고 있다, 끝났다, 택시 타는 중이다, 택시에서 내렸다, 대문 앞이다 문 열어라 에서 방안으로 골인하는데 까지 20 여 통의 전화를 해 대는데 그래도 견딜 만 했던 것은 연예시절에 맨 정신으로는 단 한번도 안 해준 "사랑한다"는 말을 하룻밤 새 스무 번을 넘게 들을 수 있다는 거였죠.
다음날 호기심에 가득 찬 제가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여보, 여보. 부장님이 아가씨랑 뭐가 어쨌다고?" 온갖 수다를 다 떨고 물어 보면 "뭐여~~~무신 귀신 씬 나락 까먹는 소리 하는 겨~~어"라며 한 대 쥐어박는 소리를 하지요. 마치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휑~~~하고 출근을 하는데 참 이럴 때는 제 팔 다리에서 기운이 한꺼번에 쑤~~~욱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답니다. 그러기를 결혼 10년. 듣기 좋은 소리도 한 두번 이라고 밤 새 잠 못 자게 하는 이 '사랑한다'는 소리가 징그럽기까지 해서 한번은 전화',휴대폰 모두 꺼 놓고 아주 오래 간 만에 단잠에 빠져 있었더니 새벽 1시 즈음 앞집 아주머니가 잠옷 바람으로 헐레벌덕 달려 와 대문을 두드리더라 구요.
"애기 엄마. 아무 일 없어? 신랑이 전화를 안 받는다 구 가 보라고 해서..... 별일 없지?" 하는데 참 기가 막히더군요.
이렇게 15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직장 관계로 주말 부부가 되면서 이제 그 지겨운 사랑타령도 들을 수가 없게 됐네요. 지금은 우리 남편 한잔하고 난 후에는 "미스 리. 혼자 살어 그런지 왜 자꾸자꾸 몸이 아파 온 다냐?" 할 때는 코끝이 찌~~~잉 해져 온답니다.
옛날 그 지겨웠던 '사랑한다'며 밤새 잠 못 들게 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지기까지 하는데 어쩐데요?
그런데요 이 나이가 되도록 궁금한 게 있답니다.
김형곤 씨!
남자 분들 술 드시고 하는 말. 정말 믿어도 되나요?
혹시 뻥(?)아닌가요?
남편이 노래방 가면 제 눈을 지긋이 바라다 보며 불러 주었던(이 때도 한잔 꺽은 상태. 아리딸딸) 조용필의 '일편단심 민들레' 오래간만에 남편을 생각하며 듣고 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