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해 주십시요!!

저녁을 먹고 거실 커튼을 치던 나는 문득 멈칫했다. 길 맞은편 집 마당에서 꽃 무리가 흰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무엇인가에 이끌려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십 년은 족히 넘었음직한 커다란 나무에 무슨 꽃인지 분간이 안가는 작은 꽃들이 빼곡이 피어 있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내내 떨고 있다. 향기로운 바람 냄새를 맡으며 그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발길이 멈춘 곳은 길모퉁이의 비디오가게 앞이었다. 마땅히 갈 만한 곳이 없었다. 만화 가게를 겸하고 있는 가게 안에 손님이라곤 만화책을 훑어보는 중학생 하나 뿐이었다. 뭘 빌려야 할지 몰라 십분 넘게 왔다 갔다 하기만 했다. 결국 내가 빌려온 테이프는 99년도인가 일본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호기심에서 보았던 <나라야마 부시코>라는 영화였다. 나름대로 충격을 받긴 했지만 두 번씩이나 볼만큼 대단한 감흥을 받았던 영화는 아니었다. 왜 그걸 빌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식구들이 다 잠든 뒤 슬그머니 일어나 불도 켜지 않고 테이프를 틀었다. 우중충한 화면을 채운 궁핍한 주인공들의 모습은 겨울밤에 어울리는 듯 싶었다. 하지만 점점 영화에 빠져들면서 왜 내 손이 그 테이프를 집어 들었는지 어렴풋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잔재미를 주는 조연들 사이에서 시종 어두운 얼굴을 한 어머니와 아들로부터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옛날, 지독히도 가난한 일본의 산골 마을이 영화의 배경이다. 그곳에는 식량을 축내지 않기 위해서 70세가 되는 노인을 나라야마 산에 내버리는 우리의 고려장과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 69세가 돼도 여전히 정정한 오린은 우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돌절구에 앞니를 찧어 깨뜨린다. 스스로 나라야마에 들어가겠다며 머뭇거리는 아들 다츠헤이를 채근해 죽음의 길을 떠나는 모습이 처절했다. 정말 인간에게는 더 이상 도움을 줄 수 없는, 짐이 되기만 할 뿐인 부모를 버리고 싶은 잠재 의식이 도사리고 있을까. 해골이 나뒹구는 계곡에서 어깨에 수북이 쌓이는 눈을 맞으며 의연히 죽음을 맞이하는 오린을 보면서 비로소 맥락을 찾지 못했던 내 마음의 한 켠을 엿보았다. 낮에 일하러 가신 어머니의 뒷모습을 나는 아직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입맛 나는 밑반찬이라고 오이 장아찌를 해놓고 가셨다. 시커먼 게 고추장에 버무려진 무장아찌하고 비슷했다. 입에 넣고 씹으면 섬유질 때문에 찔깃거리고 씁쓰름한 맛이 났다. 이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의 말로는 그게 바로 제 맛이라고 했다. 아직 음식의 깊은 맛이 뭔지 잘 모르는 내게는 그저 짭짤한 밑반찬일 뿐이지만. 나를 바라보시는 어머니의 눈은 사춘기의 나를 안타까워하던 눈빛 그대로였다. 줄곧 방에 틀어박혀 가족들과는 일체의 대화를 거부해서 어머니 속을 태우곤 했었다. 그렇다고 섣불리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않으셨다. 어린 내게 바깥 세상은 너무 눈이 부시고 시끄럽기만 했다. 자신을 감당하기에 급급한 나는 아직도 어머니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줄 모르는 무심한 아들이다. 오히려 내게 그런 걸 기대할까봐 지레 쌀쌀맞게 군 적은 왜 없었겠는가. 대문 앞에 서서 멀어져 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관절염 때문에 오랫동안 고생을 해서인지 걸을 때조차 자꾸 손이 몸으로 갔다. 자꾸 늙어만 가는 어머니 앞에서 나는 떳떳할 수가 없었다. 스무 살이 넘은 뒤로는 어머니의 걱정을 듣는 일도 성가시기만 했다. 어머니는 이젠 나만의 인생을 살고 싶어하는 나를 서운해하셨다. 걱정하시는 줄 뻔히 알면서도 외출만 하면 안부전화는커녕 묻는 말에 대답도 시원스럽게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이렇다 저렇다 말씀이 없으셨다. 웬만큼 힘들어서는 내색하지 않는 내 성격은 어머니를 그대로 빼다 박았다. 사는 일이 힘에 부칠 때마다 평생 엄살 한번 부리지 않은 내 어머니를 떠올렸다. 이쯤에서 긴장을 풀어도 좋을 만한데 항상 기를 쓰는 내가 싫어질 때마다 어머니를 원망하곤 했다. 한 번쯤은 실수도 하고 허물어지고도 싶을 때는 더욱 그랬다. 어머니의 결기는 내게 쓴 약이었다. 그 쓴맛이 독기가 아니라 자양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은 최근이었다. 그래도 마음의 긴장이 풀어지지는 않았다. 초봄부터 꽃잎이 날리며 쉬이 벚꽃나무가 물러가지 않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5월이 되었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고 나면 시간은 하루가 아니라 한 달씩 뭉텅뭉텅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시골에 눈이 펄펄 내리던 흘러간 옛날이 생각난다. 이 생각의 굴레는 마치 만질 수 없는 귀한 보석을 손에 잡았을 때의 추억처럼 지나온 길 위에 아름답던 날들의 그림들이 아니라 덧없이 보낸 쓰라린 삶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 그림에는 이기적이고 부끄러운 나의 초상이 향기를 피우고 있다. 그리고 이 그림은 어머니와의 어느 날로 나를 끌고 간다.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겨울, 그 날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학교가 시내에 있어 교문을 나설 때는 이미 눈으로 길이 덮여 미끄러웠다. 나는 한참을 지나 동사무소를 걸어 나와야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지만, 눈이 많이 내리고 있어서 버스도 오지 않자 그만 포기하고 걸어가려고 방향을 잡았다. 완주고 교문쯤 왔을 때 누가 뒤에서 "범식아"하고 불렀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시내에서 만난 우연이 너무 기뻤는지 내 어깨를 안아 주었다. 그러고 나서 손을 잡았다. "장갑도 없이 손 시럽지" 하시며 어머니는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어머니와 나는 눈 내리는 하얀 꽃밭 같은 길을 나란히 걸었다. 그 순간 어머니가 "장갑을 사주어야 할텐데, 아직 월급을 받지 못했어. 받으면 사줄게" 하시면서 내 목을 쓰다듬었다. 나는 지난주부터 내 짝이 털이 가득 든 까만 장갑을 끼고 와서 나도 어머니에게 털이 든 그 장갑을 사달라고 조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눈앞이 흐려졌다. 어머니는 이렇게 추운 날 식은 밥 삼켜 가며 찬물에 설거지를 하는 식당 일을 다니시는데 장갑을 사달라고 졸랐던 것이 철없이 느껴졌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어머니는 내 어깨를 "울기는" 하시며 나를 달래시다가 길가에 쌓인 눈 한줌을 집더니 내 목 뒤에 집어넣으면서 "허허" 하고 웃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인간다움의 향기를 담고 있다. 세상에 매달려 살아가는 이들에게 한순간 순수했던 자신을 둘러보게 하고 그래서 어머니의 향기에 젖어 눈 꼬리에 매달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참사랑의 마음을 읽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어머니를 보며 세월의 굴레에 끼어 살면서도, 오늘 같은 날엔 어머니와 나의 멋진 한순간을 가슴으로 찾아내게 되는 것이다. 한해의 중심으로 들어와 버린 지금, 돌아보면 언제나 남는 것은 아쉬움과 회한뿐이다. 형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이다. 나무 가득 노란 리본을 달아놓고 기다릴 사람이 있을 거라는 환상을 품고서 자꾸 두리번거린다. 12월이 되면 잊고 있었던 사람들이나 가족을 떠올리는 일이 부쩍 많아진다. 고통이나 어려움을 겪을 때 가장 끝까지 남아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게 가족임에 크게 놀라지 않는다. 대부분 어머니셨다. 언제나 그래왔다. 그러면서도 소중하고 귀한 존재임을 일깨워주지 않으면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기억하고 맹세하고 잊어버리고 또 다시 기억하고 잊고... 모두 다 인간이기에 그런 허물조차 서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오이 장아찌 맛의 여운이 오래 남아있다. 어머니의 거친 손을 잡고 정류장까지 함께 걸어가지 못한 후회 역시 여태 털어 버리지 못했다. 입에 고이는 씁쓰름한 맛이 가족의 정은 바로 그런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한번 두 번 젓가락이 갈 때마다 입안이 개운해 지면서 자꾸 밥을 떠 넣게 된다. 볼품 없어도 자꾸 눈길이 가고 씹는 맛이 있는, 입맛을 돋우고 몸을 키우는 그런 것 말이다. 내일 아침에는 어머니에게 꼭 얘기하고 싶다. "늘 당신을 잊고 지냈습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받은 따뜻한 사랑은 저를 살아있게 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그것만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 5월16일이 저희 어머니 생신이십니다. 저희어머니께 꽃선물을 드리고 싶은데... 좀 도와주세요^^ 꽃배달 꼭 부탁드립니다. 전화:063-633-8345 주소:전북 남원시 조산동 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