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의 두근거림

처음의 두근거림 신작로라는 말속에는 흙먼지 풀풀 날리고 덤프트럭 때문에 길가에 잡풀 꽃들이 뿌옇게 회색 모자를 쓰고 있다. 덤프 트럭은 우리가 신작로를 걸을 만 할 때면 가끔씩 돌덩이들을 쏟아놓곤 했었다. 자동차도 거의 다니지 않았던 여름 그 무렵, 흰 칼라 와이셔츠에 단정한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서 학교를 물었었다. 학교 쪽을 가르키며 "저곳인데요" 하며 "누구세요" 하고 우리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물었었다. 시골이라 외지 사람들을 별로 만날 기회가 없었으니 새로운 이야기 상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물음에 대답도 없이 "그럼 내일 만나자" 하며 자전거를 타고 바람처럼 달려 가 버렸다.우리들은 참새떼 처럼 한마디씩 자전거 뒤에다가 쏘아 붙였다. 예의가 없느니, 건방지다느니 하며 종알 거렸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다음날 조회 시간에 어제 본 그 남자가 우리 반 담임이라며 소개를 하셨다.모두 쥐구멍을 찾고 싶었다. 도시에서 오신 선생님은 검게 그을린 우리 시골 아이들 앞에 서니 눈부시게 빛이 났었다. 어느 날 선생님은 가정방문을 하겠다며 모두에게 자기 집이 있는 동네를 물었었다. 그때는 모두가 가난한 시대라서 거의가 초가집이었고 사는 게 형편없었다. 담배 농사를 많이 하는 우리 집은 그날 담배 잎을 따는 날이라서 식구들 모두가 밭으로 나가 어스름해가 기울 무렵 소달구지에, 지게에 담배를 가득 싣고 돌아왔었다. 옷에는 담배 진딧물이 묻어 끈적거리고 땀에 젖어 모습이 꼴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선생님이 오셔서 부끄럽고 당황하여 뒤란으로 들어가 숨어 나오지 않자 몇 번 부르시다가 가신 일이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나온다. 지금까지 내가 살면서 문학의 꿈을 버리지 못한 것도 모두 선생님 덕이다. 문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문예부를 만들어 날마다 하교 후에 모아 놓고 문학공부를 가르치셨다. 산문 글, 동시를 날마다 숙제를 내고 시 한편씩 외워 오라는 말씀이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전기불도 없던 때라 호롱불 밝혀놓고 콧구멍에 그을음이 차도록 등잔 밑에서 쓰고 또 쓰고.... 그래서 군(읍내)이나 도 대회를 나가면 우리 반 아이들이 거의 상을 차지하고 학교에 경사가 되기도 했었다.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동네에서 하숙을 하시던 선생님은 날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다. 방향이 같은 아이들을 두 서 너 명씩 한꺼번에 태우고 신나게 달리며 콧노래를 부르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자전거에 타지 못한 아이들은 얼마나 그 모습이 부럽던지.... 아직도 신작로라는 말에는 담배 꽃처럼 순수한 하이칼라 스물 세 살 선생님이 있고. 부끄러움의 끝자락에서 피어난 내 가장 처음의 두근거림이 있다 불혹의 나이를 중반에 머물면서 나는 아직도 문학소녀다. 그때 그렇게 선생님께 지도를 받지 않았다면 편지 한 장 쓰기도 어려웠을 게다. 아직도 그때 외우고 다니던 시는 생생하다. 선생님이 서울 어디에 살고 계시다는 근황만 바람결에 듣곤 하지만 아직까지 선뜻 찾아뵙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문학소녀로 붙들고 계시는 선생님을 한번은 꼭 찾아뵈리라 오늘도 마음속으로 약속을 한다. 선생님!! 언젠가는 선생님의 가르침 열매 맺어 문단의 세계에서 제가 시인으로 발표 되면 기쁜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오래오래 건안하십시오.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 안행 현대@ 103동 506호 강 명 자 016-657-5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