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곡성에 사는 화훼원예를 하는 농사꾼의 아내입니다.
비오는 아침에 비닐하우스에서 장미를 꺽다가 문득 보기도 아까운 내 동생이 생각이 났어요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코끗이 찡해옵니다.
지금부터 삼십년전 일입니다.
저는 어려서 아버지께서 사업하시다 부도가 나서 집에는 차압이 들어오고 집도 빼앗기고 길거리로 나앉았습니다.
그 해 겨울은 얼마나 추웠고 눈도 많이 오던지 오빠들과 동생은 고모집에 얹혀 살고 아버지, 어머니, 저는 빼앗긴 집 마루에서 솜이불을 덮고 셋이 움크리고 자노라면 저를 안으신 엄마와 아버지는 아이고 귀덕이가 천덕구더기가 됬다하시며 소리 죽여 우셨어요
그렇게 그해 겨울을 지내고 저는 엄마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초등학교 졸업도 안하고 리어카행상과 안해본 장사가 없을 정도로 그 고생은 말할수가 없었어요
굶기를 밥먹듯이 하며 그 와중에 우리아버지께서는 화병으로 오십을 갓 넘기시고 어린자식을 못 잊어서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돌리시며 눈물을 주루룩 흘리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흔한 꽃상여 한번 못타보시고 대로짠 늘에 노란종이에 덮혀서 장례식을 치루었습니다.
그때 내 나이 열두살 내 동생은 열살 내위 오빠는 열네살 이었어요 우리 큰 오빠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였기에 그래도 의지가 되었는데 힘든 일을 마다 않고 열심히 살았는데 오빠가 군인을 가게 되는날 그날 얼마나 울었던지 하늘이 무너지는 그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오빠와 동생은 공부만 했어요 그 결과 둘째오빠는 문학박사기를 따고 전주 모여고 영어선생님으로 재직중이고 그 어린 내 동생은 서울대를 나와 그 어려운 세무사가 되어 사무실도 개업하고 좋은 아내 만나 열심히 살고 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았는지 그동안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바르게 커나온 우리 사남매 저를 남편으로 딸로 생각하며 40에 홀로 되신 우리 엄마 이제 자식들이 다 훌륭하게 장성했지만 그 젊은 청춘이 다 사그라 들고 팔순을 바라보고 계시지요
제가 이곳 곡성으로 시집갈때 어려서 고생했는데 겉으로 내색은 안하셔도 한달은 우셨대요...
사는게 힘이 겨워 어머니께 하소연을 하노라면 내이름을 부르시며 어려서 고생한 이야기를 하시며 우리 딸은 잘 해낼거라며 새털같이 많은날 항상 좋을수만 없고 인생이 날씨와 같다며 저를 다독거려 주곤 하십니다.
그래서 인지 제가 강해지고 마음에 여유마저 생기지요 이젲는 저도 엄마가 되어보니 우리 엄마가 사신세월이 치근하기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바램이 있다면 우리 형제들 건강하고 군산에 계신 우리엄마 그리고 우리 시부모님 건강하셨으면 합니다. 배움이 없어서 두서없는 글이지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추신: 이 글이 만약에 체택이 된다면 서울에 있는 내동생 박상범에게 꽃
다발을 선물하고 싶네요 고맙습니다.
박경애-곡성군 곡성읍 신기리 1구 506-1번지
핸드폰=011-642-6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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