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보다 더 따스한 마음의 김치

화사한 봄꽃들이 서로 다투듯 꽃망울을 터트려대는 봄날의 일요일 저는 요즘 금추가 되어버린 김치를 담았어요 만만치 않은 채소가격때문이기도 했지만 일주일에 하루만 쉬는 직장이라 자꾸 미루기만 하다 큰마음 먹고 이른 아침부터 일찍 서둘렀어요 대문앞 누렁이를 벗삼아 토방앞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봄볕보다 더 따스한 마음을 담아 여기보다 더 따스할 여수에 보내기 위해 배추김치,열무,파김치까지 담아냈어요 남해바다 여수에는 저희 시누이가 살고 계세요 저에게는 언제나 시린 가슴으로 다가서고, 한번 다녀 올때면 못잊어 자꾸만 자꾸만 뒤돌아 보시며 눈물을 훔치시던 시어머니가 그토록 안타까워 하시는 형님. 150cm도 안되는 키에 40kg이 겨우 되시는 외소한 몸으로, 한쪽팔과 하반신이 마비된 남편과 세아들을 꿋꿋히 보살피고 키워내신 형님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리고는 합니다 그러니까 벌써 23년전, 벌목현장에서 일하시던 고모부께서 쓰러져 나무에 깔리는 사고를 당하시면서부터 형님에게는 가시밭길의 인생이 시작되셨어요 다친 고모부는 몇달째 의식불명인데도 회사측에서는 제대로 보상을 해주지 않으려고 사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타지로 다 보내버리는 방법으로 일처리를 하려하고,그때 당시 초등학교 5학년,3학년, 그리고 일곱살이된 막내를 보고 있자니 형님은 절망 그자체였다고 합니다 궁리끝에 형님은 병원의 구내식당에서 일하게 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는 반협박과 통사정으로 병원장님과의 면담을 성사시켜 본격적인 병원생활을 시작하시게 되었죠 구내식당일과 병원의 허드렛일까지 죽을 힘을 다해 가며 일을 하고 틈틈히 고모부 간호하고,짬짬이 병실 바닥에서 하루 한두시간의 잠으로 버텨나가시기를 5년여. 그동안 조카들도 제각가 신문돌리고 우유돌리고 공병이라도 줍고, 끼니때가 되면 병원으로 가서 엄마를 돕고 해야 밥 한 그릇 얻어먹는 그런 처절한 생활이었어요 "살아있다"는 표현이 너무도 우스울정도의 고통의 세월을 보낼 즈음, 병원에서는 더이상의 치료가 불가능하다며 퇴원을 강요했고 그추운 겨울날의 어느날 갑자기 산꼭대기의 삭월세 단칸방으로 옮길수 밖에 없었지요 너덜너덜한 문풍지에 불도 잘 들어가지도 않는 아궁이,뻘건 녹이 슬어 불마저도 잘 붙여지지 않는 석유곤로가 살림의 전부였고, 옷은 입고 있는 옷이 전부요,당장에 간장 한 종지 없는 현실 앞에, 형님은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라며 저를 붙들고 통곡하실때 파란하늘이 시커멓게 되도록 저도 같이 울었습니다 한참을 울고나니 날은 컴컴해지고 그대로만 있을 수가 없어서 그길로 시장에 나가 쌀한말 팔고 김치 담을 찬거리를 사다가 번갯불에 콩볶듯 겉저리를 담아 내면서부터 시작된 김치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그동안 형님은 닥치는대로 일하시다 지금은 그래도 쓰레기 분류하는 고정적인 수입원이라도 가지고 계신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형님 지금껏 대소변도 못가리는 고모부 모시느라 얼마나 힘드세요? 31살이라는 청춘에 과부아닌 과부로 살아오시며, 온갖 세상풍파와 역경을 그작은 몸으로 다 막아내시며 정말 "고생"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세월을 보내셨어요 겨울날에도 여름에 입던 시커먼 몸빼바지 하나 걸치시며 계절을 모르고 지내시던 모습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네요 남편없는 오해를 받으며 설움에 못이겨 없는 오기까지 부리시고, 아들만 셋에다 아프신 고모부를 모시고 남의 집을 살자니 쉽게 세를 구하지도 못하고,또 세를 구해도 아들들이 기죽는 것이 그리도 서운하다고 하셨지요 형님 언제나 건강만이라도 지키세요 제가 형편이 되면 많이 도와 드리고 싶은데 죄송하구요 변함없이 새김치 담았으니 맛있게드세요 전북 완주군 이서면 상개리 311-43 집)222-0806 직원핸드폰 019-669-6977(작업현장이 사무실과 거리가 좀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