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분 방송으로 매일 만나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라서 선뜻 내놓질 못했는데 벌써 몇 달이 지나버렸군요. 그러니까 지난 추석을 이틀 앞둔 날 저녁, 그 날도 오후 운동을 마치고 땀을 흘린 뒤라서 동료들과 가볍게 생맥주를 한잔하느라 다른 때보다 더 늦은 열한시가 넘은 시간, 어느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귀가가 늦으면 항상 주차 때문에 여기 저기 살피고 있는데 역시나 아파트 주차장엔 빈자리가 하나도 없고 벌써 통로까지 빼곡히 들어차 있어 다시 돌아 나와 근처에 있는 골프연습장 주차장을 가보니 운동이 끝난 시간이라 주차공간이 많이 비어있었습니다. 내일아침 일찍이 차를 뺄 요량으로 하루저녁 또 신세를 지기로 하고 비어있는 칸에 차를 세우고 나오는데 옆에 주차해 있는 차의 뒷 트렁크 위에 무슨 가방하나와 핸드폰이 얹어져 있는게 아닌가. 누가 방금 얹어놓고 근처에 있나 해서 두리번거려 봐도 아무도 없다. 차안에도 골프연습장 밖에까지 나와봐도 역시 인적이 없다. 그럼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하고 한참 생각을 해봐도 잘 추리가 되질 않는다. 그래서 그냥 올까하다 그래도 혹시 누가 잊고 그냥 간 거라면 그게 뭔지는 몰라도, 다행히 주인이
다시 와서 찾아간다면 모르지만 만약 주변에 늦게까지 쏘다니는 젊은 사람들이 이걸 보면 그냥 놔두질 않을 것 같은 불안한 생각이 들어 다시 가서 가방을 들어보니 제법 묵직한 느낌이 드는 게 내용물이 궁금해 쟈크를 열어봤다. 고무줄로 묶은 돈 다발이며 묶이지 않은 수표와 현금이 들어있질 않는가! 세상에 이런 돈을 누가 이 밤중에 여기에다 놓고 그냥 갔단 말인가! 이걸 여기다 놓고 그냥 간다면 정말 어떻게 될지 불안한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무슨 연락처라도 있는지 다시 살펴보니 수첩 같은 게 있긴 있는데 거래처와 숫자들만 적혀있을 뿐이었다. 그럼 핸드폰을 보면 혹시 본인 전화번호 같은 게 저장되어있지 않을까 해서 열어봐도 주위가 어두울 뿐 아니라 낮에도 돋보기가 없으면 신문도 못 보는 시력이라서 세워둔 차에 들어가 실내등을 키고 열어봤으나 역시 글씨들이 희미한데다 핸드폰이 내 것과 기종이 다른 최신형이라서 방법을 몰라 알 수가 없었다. 할 수없이 집에 가서 밝은 불빛에 안경을 쓰고 보면 알 수가 있겠다는 생각에 가방을 차에다 두고 잠근 뒤 핸드폰을 갖고 집으로 왔다. 식구들이 모두 잠들어 있어 조용히 거실에서 불을 키고
돋보기를 찾아 쓰고 여기저길 눌러봐도 도대체 몇 년 된 구닥다리 내 핸드폰과는 기능이 달라 방법을 모르겠다. 그래서 언젠가는 누가 찾기 위해서 전화를 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일단 옷을 갈아입고 씻은 뒤에 거실에서 TV를 키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슬그머니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던 가슴이 쿵쾅거리는게 아닌가.
그렇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시내 중심지에서 어엿한 메이커 대리점을 하면서 돈도 남처럼 벌만큼 벌면서 잘 지냈었는데, 건물주인 친구의 부도로 그만 그 건물이 경매에 부쳐졌다. 그러자 워낙이 몫이 좋은 중심지라서 경락이 빨리 되어 보증금 몇 억을 한푼도 못 받고 점포를 비워 줘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본사에서는 메이커의 생명인 몫 좋은 중심가에서 장사를 할 수가 없으니 대리점계약을 해지해야겠다며 하루아침에 진열된 재고들을 몽땅 실어 가버렸다. 그리고 그 점포를 얻기 위해 내 소유의 건물 두 채를 설정하여 받은 대출금을 장사를 못해 그 원리금을 갚지 못하게 되자 설정 된 그 건물이 경매에 부쳐지게 되었다. 그동안 몇 년을 하루도 어김없이 정확히 원금과 이자를 갚아왔는데 삼 개월만 연체되면 바로 채권확보에 착수한단다. 결국 장사도 못하고 얼마 뒤 살고있는 집을 비롯해서 나머지 한 동까지 건물을 잃고 졸지에 셋방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때가 마침 IMF의 절정기라서 모두가 어려운 때였기에 나는 직업을 잃은 상태였으나,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던 아내 때문에 어찌어찌 생활은 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는데, 장사를 하던 때 공무원인
아내의 보증으로 세 군데 은행에서 신용대출을 받은 것이 정리가 안되어 결국 그들로부터 급여압류라는 치명적인 처분을 받게된 뒤부턴 정말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거기다 고 3인 딸아이는 수능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치르고 나서 서울의 명문대에 특차로 지원을 했더니 덜컥 합격을 한 것이다. 남들은 대학엘 들어가기만 해도 다행스러운 판에 명문여대에 그것도 특차로 합격을 해서 기쁘고 장하긴 했어도 솔직히 걱정이 더 컸던게 사실이다. 사백만원이 넘는 등록금하며 하숙비와 용돈을 어떻게 해야할지 도무지 계획이 서질 않아 결국 아내와 내가 타던 차를 없앴다. 그리고 나도 뭔가를 해야겠기에 여기 저기를 알아보다 마침 선배님이 경영하는 회사에 다니기로 해서 그나마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건 임시변통일 뿐 근본적으로 해결이 되는 건 아니었기에 집안의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아내는 한달 내내 고생하며 다니는 직장에서 절반밖에 못 받는 봉급 날 마다 상하는 속은 고사하고라도 괜한 주위의 눈총이 무슨 죄라도 지은 것 같아 고만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으나 당장 절박한 생활 때문에 가슴만 아린 채 늘 그늘진 어두운 아내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그냥 미안하고 죄스러운 생각만 들 뿐 아무런 위로의 말조차도 할 용기가 없었다. 몇 년 전 허리디스크 때문에 수술을 두 번이나 한 터이라서 조금만 서 있거나 걸어도 허리에 통증이 있어 아내에겐 차가 꼭 필요했는데 기름값이며 보험료며 주차료등 부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니 차는 고사하고 출근을 하는 처지에 입고 다니는 옷가지도 변변히 사 입을 처지가 못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지금 돈이 나타난 것이다. 족히 몇 백만 원은 되어 보이는 돈이 말이다. 이 돈이면 그동안 딸아이 학비로 지은 빚을 조금은 갚을 수 있을 텐데, 이 돈이면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놈 학원에라도 보낼 수 있을 텐데, 아니 당장 아내에게 몇 십만 원 하는 소형중고차라도 한대사서 출퇴근 때마다 괴로워하는 아내에게 줄 수가 있을 텐데,그리고 아랫부분이 삭아서 주저앉은 세탁기며 컬러가 제멋대로 변하는 TV하며 남들이 다사는 흔한 김채냉장고 하나라도 사 줄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들이 끊이질 않는다. 그러면서 가슴은 왜 이렇게도 두근거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마음속으로 죄를 짓고 있는게 분명하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핸드폰은 아무 소리도 없어, 거실에 있는 나는 잠도 자지 못하고 그냥 불안하기만 하다. 마음속에 계속되는 유혹의 소리가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면서 비례해서 마음은 더욱 불안해 지기만 했다. 그러다 스스로의 생각에 깜짝 놀라며 누구에게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을 붉히고 생각을 추스르며 내일 아침에라도 꼭 연락이 올 테니까 그때 돌려주면 되겠지 하고 잠을 청하기로 했지만 역시 허사였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고는 자동차열쇠와 핸드폰을 들고 그 주차장으로 가보기로 했다. 혹시 누가 와서 서성이지나 않을까 해서 말이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한참이나 서성이다 그냥 아파트로 돌아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막 집 현관문을 열려고 하는데 핸드폰 음악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정말 나쁜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마냥 깜짝놀라 얼른 핸드폰을 열고 "여보세요"하니 어떤 여자목소리가 화들짝 놀라는 목소리로 "받는다 받어"하면서 누군가를 바꿔주는데 이번엔 남자목소리였다. "혹시 그 핸드폰..."하는데 내가 얘길 했다. "아 네 제가 열두시 조금 전에 주차를 하다 발견해서 그대로 두기가 위험해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방금도 제가 그곳엘 다녀왔는데 아무도 없어 들어가려는 참인데 지금 그곳이 어디죠?" 했더니 그 주차장이란다. "지금 갈테니 기다리세요"하고는 다시 그곳엘 가보니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젊은 부부 두 사람이 서있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추석명절을 앞두고 늦게까지 거래처수금을 하고 동료들과 술을 한잔하고서 돌아와 이곳에 주차를 하면서 적재함을 정리하느라 운전석에서 갖고 내린 가방과 핸드폰을 근방 승용차 뒤 트렁크 위에 얹어놓고 정리를 한 뒤, 피곤한데다 술기가 있어 그냥 깜박 잊고 집으로 들어가 잠을 잤는데 아내가 보니까 항상 갖고 다니던 핸드폰과 가방이 보이질 않아 차에 뒀나보다 했단다. 그런데 한참 자던 남편이 갈증이 난다면서 물을 달라기에 떠다주면서 가방 어디 있냐고 물어봤단다. 그랬더니 퍼뜩 놀라면서 두리번거리다가 기억이 나질 않는지 옷을 입길래 함께 나와 찾았으나 없더란다. 그래서 아내의 핸드폰으로 이제야 혹시나 하고 연락을 하던 참이었단다. 그래서 내가 "그냥 두고 갈까하다 이대로 두면 정말 잊어버릴 것 같아 내가 보관하고 있으면 분명 연락이 올 것 같아 기다리는 중이었다"고 이야길 하면서 내 차를 열고 가방을 꺼내 핸드폰과 함께 건네주었다. 그리곤 돌아서 오려는데 나를 붙잡으며 살고있는 아파트가 몇호 인지를 물었다. 그 돈은 회사에 입금을 했어야하는데 시간이 늦어 경리사원이 퇴근을 해서 내일 아침에 입금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꼭 잃어버린 줄만 알았단다. 만약 잃어버렸다면 그 돈을 자기가 물어내야 하는 입장이라며 이제 결혼한 지 육 개월도 채 되지 않은 젊은 부부로 정말 가슴이 철렁했었단다. 그러면서 조금이나마 고마움을 표하기 위하여 내일 찾아보겠다며 궂이 내가 사는 아파트의 홋수를 알려달란다. 그러나 난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이니 부담스럽게 생각지 말고 그냥 돌아가라며 도망치듯 돌아오는 나를 그들은 어쩔 줄을 몰라하며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있었다. 돌아오면서 난 많은 생각을 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콩닥거리던 가슴은 어느새 안도의 한숨과 함께 평안함이 찾아오면서 아직도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는 혼자만의 부끄러움 같은 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 나이 오십을 넘긴 내가 아직도 이런 물질에 마음이 현혹되어 잠시나마 딴 생각을 갖었다는게 못내 부끄럽기만 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내 아이들에게 착하게 살라고 이야기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한편으론 잘 간수하지 못한 물건 때문에 잠시나마 딴 생각으로 죄를 짓게 만든 그 사람이 야속하기도 했다. 하여튼 집에 돌아온 나는 냉장고를 열고 시원한 냉수를 한 컵 들이키고 겨우 편한 생각으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렇다, 이처럼 사람이 잠깐동안에도 선과 악을, 그리고 평안함과 불안함을 오락가락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천국도 지옥도 다 내 마음속에 있음을 새삼 체험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잠에 취해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여전히 미안한 마음으로 새벽이 다되어버린 늦은 잠을 청할 수가 있었다.
전북 군산시 개사동 19-4 (016-686-4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