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구야 보고싶다이잉~~~

어느 해든지 이맘때가 되면 뭔지 모를 애잔함이 밀려옵니다. 우쭐대는 햇살은 겨울의 절정의 산물로 마치 어머니의 품속처럼 따뜻한 생각을 품게 만들기에 충분하지요. 나는 그렇게 한참동안 늙을 줄을 모르는 느릅나무 밑, 내 고은 친구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들어가자마자 구식 보일러에 우중충한 살림살이가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데다 여러 세대가 다닥다닥 붙어사는 캐캐묵은 집, 바로 내 집이었습니다. 그 바로 뒷집이 연화네 집이었습니다. 하루종일 울어대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곰팡네,청국장냄새 이런냄새와 소리는 익숙해져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지요. 연화와 전 집안일을 다 할 줄 알았습니다. 워낙 어른들은 일찍 일하러 나가셔서 동생들을 돌보거나 잔 설겆기,빨래는 저희 몫이었습니다. 빨래 바구니에서 탯국물 질질 흐르는 발로 들어가 빨래를 빤건지 장난을 쳐 댄건지 찬물에 갈래갈래 무디어지고, 개떡진 머리에 옆집, 뒷집 아이 모두 이를 달고 다녀서 자연스럽게 '이'를 잡는게 일과였던 어린시절, 연화와 전 둘도 없는 친구였습니다. 오후엔 가위팔방 한다고 놀고, 얼음 땡 놀이에, 딱지치기, 숨박꼭질에 저쪽엔 그 오래된 놀이 '쎄쎄쎄'는 물론 짖굳은 녀석들의 눈에 보이면 오래 할 수 없었습니다. 헌데 연화와 제가 무척 싸운적이 있었습니다. 연화와 제가 유독 멋을 내는 날, 바로 일요일 교회가는 날이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재진이 오빠를 보기 위해서죠. 우리동네에서는 그래도 부유층에 들던 오빤 지금 생각해도 퀸카 였습니다. 어쩔수 없이 일요일만 되면 연화와 전 뭔지 모를 신경전에 그렇게 또 싸우고... 또 그담날엔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웃고... 다시 놀고... 그러다 연화가 먼저 동네를 떠났습니다. 동네가 재건축 대상이 되서 다들 하나 둘씩 떠나야 했으니까요. 가난한 동네의 겨울.. 몸도 마음도 닳기 쉬운 곳, 다를 하루 벌어 하루 근근히 살아가는 곳이었지만 전 연화가 있어 정말 했습니다. 풍선과의 한판 놀이, 딱지치기, 인형놀이, 소꼽놀이 지금도 그때가 정말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아! 돌아갈 수 있다면...얼마나 좋을까요. 신청곡: 친구여-조용필, 사랑했지만, 한번만 더, 분홍립스틱 (익산시 부송동 시영아파트 가동 40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