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사골에 가을비가 내립니다.
가을에 가랑비가 오면 우리네 어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게으른 놈 낮잠자기 좋고 부지런한놈 일하기 좋다"촉촉이 내리는 가을비속에 지리산을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화사한 단풍을 보려 아내와 나는 일지 감치 애들을 학교로 보내고 말입니다. 격주로 쉬는 토요일이고 비가 올 것 같아서 조금은 게으름을 피우고 싶지만 그러나 지리산의 그 웅장한 가을 산이 상상이 되어 부지런을 떨며 나섰지요. 남원을 돌아 고기리를 지나니 비는 안개비로 변하여 차는 구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성성히 서있는 낙엽송 가지사이로 뱅뱅 돌아 올라간 댕댕이 넝쿨도 어느새 빨간 치마를 걸치고 비를 맞고 있습니다. 여름 내내 풍성한 삶을 산 싸리나무 잎이 무성하게 노오란 단풍으로 변하여 마치 풍요로운 수확을 거두고 거죽을 내놓은 것 같았습니다. 정령치를 올라가니 남원쪽으로 햇빛이 쫘악 비쳐서 축복 받은 신천지 마냥 누런 황금빛 들녘이 펼쳐 졌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너무 벌어진 입을 억지로 다물고 우리들은 목적지인 뱀사골로 향했습니다.
공사중인 전적기념관을 돌아 뱀사골로 들어섰습니다. 뱀사골에 가을비가 내립니다. 젖어도 그만 말라도 그만하게 가랑비가 내립니다. 자연체험 등산길을 따라 들어가니 우선 낙옆지는 소리가 또 한해를 지탱한 다행함으로 들려 옵니다 .지난여름 그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잘도 견디어 내고 넉넉한 영양분으로 매서운 북풍한설과 맞설 채비를 하는그 당당함을 이제는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고 축제를 기다리는 것처럼 들떠 있습니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는 청아한 가야금 소리 같고 추수(秋水)의 맑음으로 이제는 내놓을 것은 다 내 놓았노라. 하며 나에 속을 내놓으라고 독촉하는 것 같습니다. 붉게 타오르는 단풍잎사이로 나리는 이슬은 꽃다운 나이에 이별을 서러워하는 청춘의 눈물 같기도 하고 화려한 인생을 살고 이제는 여한이 없노라. 하며 당당하게 노년을 맞는 속에 그래도 늙어 가는 것이 서러워 젓는 눈물인 것 같기도 합니다.
굴참나무 사이를 비집고 서있는 비목에 안내판을 보고 "아! 이 나무가 비목이구나" 하며 그냥 생각나는 "비목"이라는 노래를 초연하게 부르는 아내는 이미 아름다운 자연인입니다. 한 폭에 수채화 속에 느린 걸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우리 부부의 모습을 천상에 솔거가 그려놓으면 아마 새들이 날아들어 머리를 박고 죽어갈 것 같은 요즘말로 "죽이는" 그런 풍경 속으로 취한 듯 올라갑니다. 늘어진 머루나무 덩굴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마지막 단 한 개의 열매는 게으른 다람쥐를 위하여 남겨 놓은 몫입니다. 자연과 너무나 잘 어울리게 만들어 놓은 나무다리를 건너서 늘어진 출렁다리 위에서 설래는 가슴을 다잡고 모퉁이를 돌아들어 갑니다.나무중에 제왕인 소나무는 거대한 바위를 휘감고 버티고 있습니다. 모든 나무가 매서운 추위가 오기 전에 안으로 모습을 감춰서 이겨내려고 한다면 소나무는 푸른 잎을 그대로 간직한 채 당당하게 북풍과 맞섭니다. 과연 제왕다운 모습입니다. 사철을 변하지 않는 기개는 변절을 조석으로 하는 우리네를 비웃듯이 거만하게 내려 다 보며 호령하고 있는 듯 합니다. 가만 가만 소리 죽여 낮으막히 들리는 이별의 촉새 울음이 애처롭습니다.
골 깊은 곳까지 들어간 우리는 게으른 산토끼의 낮잠을 깨울까 두려워 소리 없이 산을 내려 왔습니다.
지난 토요일 지리산 뱀사골을 다녀와서/
송천1동 현대1차아파트 103/308
양용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