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두분
엊그제였던가요.아빠엄마께서 금강산을 다녀오시는 길에 저희집에 잠깐 들리셨는데요. 다리가 아프고 피곤하시다면서 주무시는 두분에 모습을 가만히 보았더니 어찌나 가슴이 미어지던지요. 머리카락은 흰머리가 더 많았고 그곱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주름살이가득차고 새까만 얼굴 거북이등껍질처럼 거칠어진손 저는 차마 그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그손을 만지고나면 제마음이 아플까봐서 말입니다. 평소에 아빠께 따뜻한 말한마디는 컫녕 퉁퉁거리기만했으니까요.이번에도 돈백만원을 제통장에 넣어주시고는 고맙다는전화한통 안하는 딸 먹고싶은거라도사먹으라고 하시는 아빠에말씀에 마음속으론 눈물이 나면서도 표현을 하지 못했습니다.지금 아빠의 연세는 74세이제 일에서 손놓고 쉬실 때이지만 아직도 자식들한테 줄농사를 지금도 뙤약볕 아래서 땀흘리고 계실 아빠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요.그러니까 60년대에 태어난 우리세대는 그겨울도 몹시 추웠습니다.저녁이면 호롱불아래서 빨간내의를 벗고 이와벼룩을 똑똑 소리가 나게 잡았죠. 그때 저는 아빠뒤에서 재롱을 피우고 있을때 오빠는 닭털을 흙벽에다가 꼿는 놀이를 하다가 제눈 가운데 를 찔러서 눈을 다쳐서 피가나고 난리가나고 했지만 요즘처럼 구급차라도 부를수 있는곳도 아니었고 병원이 흔한때도 아니어서 우는 저를 안고 밤을 새운 아빠는 날이새자 5리되는 눈길을 저를 업고 뛰었고 오빠는 그모습을 보면서 울었다고 회상하더군요.기차역에서 1시간거리를 몇달 저를업고 출.퇴근 하는데 제가 아빠등에 매달려서 병원앞만가면 아빠등을 때리면서울었다고 하니 그때 아빠의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요.그런고생도 허사가 되었지요 저는 결국 한쪽눈으로 세상을 봐야하는 장애인이 되었지만 그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그후로도 아빠는 용하다는 한약방을 전전하셨고 쓴 한약을 지어다 먹인 덕분에 많이 나았다고 하더군요.그후로 저는 학교를가게 되었지만 그시골에 장애인학교가 없으니 일반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1년늦게 들어갔지만 학교만 가면 아이들이 "개눈"이라고 놀리고 같이 놀아주지도 않아서 저는 학교다니기가 싫었지요.어린나이에8리나 되는길을 걸어가기도 싫어서가끔은 늦잠을 자거나 핑계를대면서 학교를 결석하려교하면 자는 저를 안아다가 세수 해서 머리빗기고 옷입혀서 저를 업고 8리나 되는 길을 업고 가시다가 시장에 들려서 들리는곳은 추운겨울에 따뜻하게 먹을수 있는 찐빵가게였지요. 가게의 큰 찜통에서는 항상 뜨거운 찐빵이나 만두가 익어가고 있었지요.그때 아빠등에서 먹던 찐빵맛은 지금도 못잊고 있으며 시장에가면 아빠생각아나서 한번은 아빠를 모시고 찐빵가게에 들른적이 있습니다. 아빠께서는 참 맛이게 드시더군요. 저는 그때 아빠의등이 참 넓은지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야위셔서 앙상하신 아버지를 뵐때면 가슴이아파서 똑바로 쳐다보지를 않고 있어요.항상 젊으실줄만 알고 늙으실지를 몰랐던저는 아빠한테 너무 많은것을 요구했습니다.학교갖다오면 아빠가 일하는 들녁을 찿아가 간식거리를 부탁하면 요즘같으면 보리라도 불에 구워서 비벼주셨고 오디.목화솜. 삐비.산딸기.순대등 먹을것이 있으면 저부터 챙겨주시고 육남매중 사랑을 제일 많이 받고 자란 저는 아빠덕분에 비뚤어지지않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저는 아버지를 위해 해드린것이 별로 없습니다. 부모님에 수의를 해놓고 보니 후회가 됩니다 기금부터라도 잘해야지 하는데 저희집 사는것이 어렵다보니 마음뿐입니다.아버지 시랑합니다 아버지에 크신사랑 저도 아이들한테 물려주구요.앞으로는 마음만이라도 편히 사세요.이못난딸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아빠 고맙습니다. 이젠농사오 좀 줄이시고 편히사세요 돌아가실때까지 그러고 가시면 제가 불효자가 됩니다 쉬어가면서 하세요 제발??
보낸이:전주시 덕진구 반월동 삼오아파트 102동1507호 에서 tel:9028906
두분 제글이 당첨 된다면 상금으로 아빠 촣아하시는 해산물 많이 사드리고 싶어요.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