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5년전이네요.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가슴이 꽉 막히는 듯하고 답답한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식구들이 모두 초상이 난것처럼 울어대던 그때 유난히도 눈물이 많은 저이지만 이상하게 아무것도 느끼지못하는 사람처럼 멍해져있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그날 대학병원에서 폐암말기라는 사형선고를 받으셨었지요.저는 그때 대학 2학년이었고, 대학생이 되었다는 기쁨에 가족과 함께하기 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밖으로만 돌던 때였습니다.
마치 누군가에게 큰사기라도 당한듯 울부짓는 가족들,
너무나 갑작스럽고 무서운 이 상황을 애써 부정해보려 저는 한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습니다. 저까지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의사들의 말처럼 될것 같아서였지요. 이대로 떠나신다면 우리 아버지 불상해서 어떻하나 . .. 식구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없이 흐느꼈습니다.
아버지는 말없이 과묵하신분입니다. 오죽하면 아버지와의 대화는 "다녀오셨어요"."다녀오세요" 이두마디가 전부인 하루도 많았습니다.
그러던분도 너무도 억울하셨는지 가족과 함께 소리내어 우시던 모습 , 그 모습을 바라보는 무기력한 자식의 마음이란 이루 말로할 수 없었습니다.
평생을 힘든 노동일로 자식들을 건사해오신 우리 아버지, 그분의 손가락 마다 마디마다 거친 시멘트와 험난한 노동일의 대가로 하얗게 갈라져 있습니다. 어쩌다 아버지 손끝이라도 스칠때면 어찌나 거칠고 따가웠던지, 겨울이면 그나마 쩍적갈라져 버려도 아버지는 병원 한번 찾지않고 집에 있는 연고 몇번 바르는 걸로 족해하셨습니다.남들처럼 외식한번 못해보고 여름이 되고 겨울이 되고 그렇게 몇십번을 바꿔살았어도 그 흔한 여행한번 가보시지 못한채 , 눈보라치는 새벽에도 자전거를 이끄로 일터로 나가시던 아버지셨습니다. 그렇게도 열심히 사셨지만 언제나 아버지에게 삶이란 너무도 무거운 짐이였습니다. 하지만 철몰랐던 저는 남들처럼 비싼 옷 사주지않는다며 비싼 신발 사주지 않는다며 투정만 부렸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퇴근하고 돌아오시는 길에 다른 아이들의 아버지처럼 맛있는것을 사들고 오시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의 아버지보다 잘해주시는게 있었지요. 그건 바로 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부쳐주시던 김치빈대떡이였습니다. 아버지는 비가오면 일터에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학교에서 일찍오는 날이면 뜨끈 뜨끈하고 쫄깃한 김치 빈대떡을 몇장이고 부쳐주시곤 했지요. 지금도 비가오면 그때 그 맛을 내보려고 애써본답니다. 이젠 저도 한가정을 이루고 사는 새내기 주부가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보니 우리 아버지가 참 자상하신 분이구나하는걸 깨닫게 됩니다.
대학병워의 애상과 달리 아버지는 수술을 받으시고 지금까지 살아계십니다. 그리 건강하시지는 않지만 그몸으로도 운동이라도 해야한다며 아른 새벽에 자전거를 끌고 나가십니다. 휴일도 없이 아파트를 지키는 수의일을 하고 계시지요. 아프고 나신뒤 많이도 늙으셨다는 걸 느낌니다. 제가 조금더 능력이있다면 아버지 여행이라도 보내드리고 싶은데. 아버지에게 얼른 손주를 안겨드리고 싶은데 조급해서인지 아이도 아직 소식이 없네요. 지금 이 시간에도 아파트 경비실에서 쓸쓸히 앉아계실 아버지. 아버지란 단어만으로도 너무 눈물이 납니다. 요즘 아버지가 부쩍 입맛이 없고 드시질 못한다고 해서 너무 가슴이 아파요. 아버지 제발 오래 사셔야 해요. 제가 손주도 안겨드리고 여행도 보내 드릴때까지만 이라도요. 아버지 비록 아버지 속만 상하게하는 못난 딸이지만 꼭 그렇게 해주실께죠? 아버지 불쌍한 우리 아버지 사랑해요. 부디 건강하세요. 꼭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