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8일 방송분

제 나이 쉰 여섯. 제가 교육공무원 자리에 있기까지 어머니의 힘이 컸습니다.

부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를 찾아

김제로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을 때의 일이예요.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오후 집안 어른이신 아버지의 백부님과 숙부님,

그리고 종가집 형님들까지 다섯 분이 집에 오셨습니다.

"사기 그릇과 계집아이는 집 밖으로 돌리면 깨지거나 이가 빠진다..

계집아이를 김제까지 학교를 보내 어디에 쓰겠냐? 없던일로 해라."

집안어르신들은 계집아이를 김제까지 학교를 보내신다며

부모님께 호통을 치셨습니다.

작은방 구석에서 전, 혹시나 학교를 가지 못하게 될 까

두려움과 무서움에 숨죽여 울고있었죠.

 

남존여비사상이 뿌리 깊던 시절. 시골마을에서...

그것도, 7남매 맏딸로 태어난 제가, 중등교육을 받겠다고 도외지로 나간다고 하니,

집안어르신들이 반대할 만도 했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논밭으로 물려준 재산은, 도둑 맞아 잊어버릴 수도 있지만

머릿속의 재산은 남이 도둑질 할 수 없으니,

제 자식들은 아들, 딸 구별 않고 원하는 데 까지 가르칠거예요,

어르신들과 친척들께 손벌리지 않을테니, 걱정마세요."

어머니의 떨리는 그 목소리는 내 가슴에 커다란 희망이 되었습니다.

1950년대와 60년대 우리모두 힘들고 어려운 시절.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고난을 슬기롭게 이기면서 7남매 모두에게

배움에 있어서는 한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딸을 키우면서도, 보수적인 제 남편과 맞서며 항상 떠올리는 추억얘기예요...

아들은 친구들과 여행도 보내고, 가끔 외박을 해도 나무라지 않는데,

대학생이나 된 딸아이는 유독 간섭하고,

옷차림부터 하나하나 스트레스를 주더라구요.

저는, 항상 남동생들과 동등하게 키워주신 어머니 덕분에,

딸의 입장에서 맞서, 남편과 싸운답니다. 그래서 인기만점 엄마죠.

어렵던 그때를 떠올리며,

그리고 제게 삶의 추억과 지혜를 주신 엄마께 감사드리며,

어머니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우리곁에 계시기를 바랍니다.

 

사연보내주신 진옥남씨,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