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함께 해 온 도장..

오래된 친구에게 모처럼 편지 한 장을 써놓고 우표를 찾기 위해 여기 저기 서랍을 뒤졌습니다. 분명히 지난번에 몇 장 사다 놓기는 했는데, 남편이 또 서랍 정릴 한다며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는지 늘 있던 자리에 없더군요. 그렇게 이곳 저곳 뒤지다 보니 서랍 한 귀퉁이에서 도장 하나가 나왔죠. 처음엔 진한 초록색이었는데,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은 옅어지고 희끗희끗해진 제 이름이 새겨진 도장이었습니다. 벌써 20년이 된 물건입니다. 제가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을 때... 4남매 중 장녀였던 저를 참 예뻐하셨던 아버지께서 입학 선물로 만들어 주신 것이었죠.. 그 당시엔 도장이라고 해봐야 그냥 나무에 한자나 한글로 이름만 새겨져 있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그 날 아버지께서 큰 마음먹고 새겨 오신 그 도장은 맨 처음 뚜껑을 열면 한자가, 그 다음 뚜껑을 열면 한글이름이 그리고 그 다음 뚜껑을 열면 성만이 새겨진 3단 짜리 도장이었습니다. 모든 서류에 일일이 도장을 찍어야 했던 당시에는 친구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였죠. 그렇게 아버지께 중학교 입학선물로 받은 그 도장은 학창시절엔 친구들 사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첫 직장을 얻어 내 이름으로 된 적금 통장을 만들 때도 함께 했었죠. 인감 도장 역시, 그걸 사용했고.. 스물세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 반대를 무릅쓰고 혼인신고를 했을 때도 그 도장을 써야 했습니다. 그러다 첫 아이를 임신해 만삭인 즈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엄마와 함께 의료보험 공단에서 나오는 장례비용을 받아올 때도 역시 그 도장을 꾹- 찍어야 했습니다. 지금까진 몰랐습니다. 그 도장이 20년이나 되었다는 것도... 그리고 내 삶 곳곳에 그 도장이 없이 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을요... 이제는 너무 오래돼 헐거워 질대로 헐거워져, 뚜껑도 저절로 열려버리고 인주를 아무리 많이 묻혀도 이름 석자가 선명하게 나오지 않지만, 앞으로 당분간은 아니 어쩌면 평생을 저와 함께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남편이 아이의 도장을 만들어왔습니다. 그걸로 아이 이름으로 된 통장을 만들어주고 싶다구요. 저는 코바늘로 예쁜 도장집을 떠 만들어 줬습니다. 요즘이야 도장 없이 자필 싸인만으로도 모든 게 해결되지만 그 옛날 내가 그랬듯 이 도장도 늘 아이 옆에 함께 있어줄 것 같아 괜히 마음 든든하고 행복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