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초여름 날의 오후

이학구 초여름의 따가운 햇볕 때문에 아스팔트의 열기가 바짓가랑이에 스멀거린다. 보도를 걷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햇볕을 피해 볼 셈으로 폭 좁은 가로수 밑 그늘을 찾아 이리저리 발길을 옮기면서 걷는다. 많은 차들이 사정없이 소음을 지르며 씽싱 달린다. 휙휙 더운 바람을 가르면서 내달리는 차들 때문에 몸에 촉촉하게 베인 땀이 더 끈적거리는 듯하다. 횡단보도를 건넜다. 북향 상가 건물 덕분에 그림자가 만들어져 한결 시원하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한가한 휴일 오후, 친구들과 함께 맥주라도 한잔 마셔 볼 속셈으로 시내에 가는 길이다.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가고 있었다. 건물의 그림자가 반쯤 드리워져 있는 보도에 2평 남짓 색 바랜 비닐을 깔아 놓고 양말, 스타킹, 덧소매, 덧버선 등을 펼쳐 놓은 노점상이 있었다. 후즐근하게 묶여져 있는 물건들은 꽤나 오래된 것들인지 아니면 중고 물건들인지 누가 보아도 별로 사고 싶지 않을 것 같다. 한쪽에는 짐자전거가 있다. 옛날 운송수단이 지게였을 때 등장한 짐자전거는 짐을 운반하는 두바퀴 수레의 편리함과 신속성을 지니고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오토바이에 밀려 민속자료실에나 있을 것 같은 자전거다. 뒤에 짐을 싣는 짐받이가 꽤나 넓고 많은 짐을 실어도 사람 등을 보호하도록 철근으로 높게 경계를 구분하고, 무거움을 잘 견디도록 핸들과 앞바퀴 중앙에 보조 철근들을 힘차게 연결한 짐자전거를 오랜만에 보았다. 노점의 주인은 70 여 세 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다.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과 깊은 주름살 때문에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의 손에는 책이 들려 있다. 잡지책도 아니고 만화책도 아닌 소설책 같다. 누렇게 퇴색된 것으로 보아 꽤나 오래된 헌책임이 분명하다.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자기 물건에게도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다. 물건 하나라도 팔려면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표정과 눈을 보면서 호객 활동을 해야만 할 것 같은데 쳐다보지도 않는다. 살라면 사고 말라면 말라는 듯이⋯⋯. 참으로 여유 있어 보인다. 독서야 말로 가장 중요한 간접 경험이요 학습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책을 읽으라고 읽어야 된다고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가장 많이 부르짖고 주장하며 강제로라도 읽히려 애를 쓴다. 적어도 자식을 키워보거나 가르쳐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경험을 했을 것이다. 물건이야 팔리든지 말든지 할아버지의 손에는 소설책이 들려져 있다. ‘춘향전’인지 ‘심청전’인지 아니면 ‘임꺽정’인지 모르겠다. 책 속에 푹 빠져 버렸다. 좌판을 거두고 집에 돌아갈 때는 천 원짜리 몇 장뿐이라 하룻장사 헛장사했다고 후회할지 모른다. 가족들의 보다 나은 생계를 위해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할지 모른다. 열심히 팔 걸 하고 후회할지 모른다. 그러나, 낡은 책을 든 검게 그을린 그 손이 귀하게 느껴지며, 눈가의 깊은 주름 안에 눈망울이 소년의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나는 버스 속에서 그 할아버지와 몇 마디 대화라도 나누어 볼 걸 아쉬워하면서 차창 밖으로 작아지는 그 모습이 이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