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해 지방방송을 켜라" | ||||
[손우기의 모닝커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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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미국의 대통령선거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당선시켰다는 기록뿐만 아니라 미국이 민주주의에서 앞선 국가임을 세계에 보여준 또 한 번의 선거였다. 오바마의 극적인 승리 때문이 아니라 미국 대선의 경선과정을 보며 실감한 것이다.
특히 ‘아이오와 코커스(당원선거)’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각 후보의 지지자들이 나와서 열띤 토론을 벌이고 현장에서 지지자들이 모여 군집을 이룬다. 15%미만의 후보는 탈락하고, 탈락한 후보의 지지자들을 자신들의 진영(군집)으로 모으기 위한 토론과 설득이 다시 벌어진다. 그리고 과반수의 득표를 차지하는 후보가 나올 때까지 반복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오바마는 중요한 첫 승리를 거머쥐고 대선 승리의 신호탄을 올렸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인격과 주장이 소란하게 부딪히고 변화하며 언쟁하고 동의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제도다. 때문에 투표도 민주주의의 한 방법이지만 이 같은 치열한 토론과 다양한 소수의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것이 온전한 민주주의에 근접한 방법이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소수의 소리에 대해서 묵살하는 경향이 있다. 우스개소리로 “지방방송 좀 꺼봐”라고 말하며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줄 것을 요구한다. 이 말은 중앙방송을 위해서 지방방송은 묵살되어도 좋고, 지방방송 보다 중앙방송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은연중 지방방송을 무시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지방방송 무시 풍조는 왜 생겨난 것일까. 어찌 보면 민주주의를 말살해온 군사정권이 국민을 통제하기 쉽도록 중앙방송 중심으로 지방방송을 통제해 온 시스템에 세뇌를 당한 영향은 아닐까. 혹은 주류나 다수라는 이름으로 횡포를 부리는 사람들의 힘 앞에 비판 없는 동의를 해온 습관적인 모습은 아닐까.
최근 전주 MBC 가을개편이 지역에 작은 파장을 부른 사건이 있었다. 서울에서 전국으로 방송되는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방송하지 않고 ‘이백희의 해피투게더’라는 프로를 신설해 전북에만 독자적으로 방송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주 MBC 시청자의견 게시판은 한마디로 ‘난리’가 났었다. 그도 그럴 것이 10년 넘게 정통 팝 프로그램으로 사랑을 받아온 방송이기에 전국 어느 방송사도 자체편성을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텐데 유독 전북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에 애청자들의 반발이 심각했다. 청취자 권리부터 시작해서 진행자와 담당부장에 대한 개인적 독설의 내용으로 인터넷과 전화로 항의가 빗발쳤다. 그러나 지금까지 ‘해피투게더’는 순항중이다. 아직도 한 두건의 인터넷 게시판 글은 있지만 항의도 한풀 꺽인 듯 하다.
지방방송인으로서 지방방송을 옹호한다는 비판도 있겠지만 ‘해피투게더’는 또 하나의 민주주의다. 지방 방송도 중요한 지역민의 권리를 옹호하고 있으며 그만한 가치가 있다. 또 행여 가치가 없다고 대다수가 판단한다고 해도 침묵을 강제할 권리가 그 누구에게도 있어서는 안된다. 지방방송은 ‘후져서’ 보기도 듣기도 싫다는 말을 하는 이들을 주변에서 자주 본다. 그렇다면 누군가 그에게 “넌 서울사람에 비해서 참 후지다”라고 말했을 때 뭐라고 반응할까 생각해본다. 변명을 할까 아니면 화를 낼까. 아마 인정하지 않고 화를 내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 만일 “웃기고 있네. 난 안 후져. 서울사람들 유행을 얼마나 잘 쫓아가고 있는데”라고 말한다면 그건 정말 ‘후진’ 거다.
DJ이백희는 지방라디오방송의 저평가 이유를 유명진행자, 유명게스트, 협찬상품 등 세 가지가 부족함을 꼽았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에게는 지역방송이 ‘잘 모르는 애들이 나와서 떠들고 상품도 적은 방송’으로 비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나마도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애초부터 유명했던 스타는 없다. 유명한 사람들만 쓰는 방송은 있지만 그건 좀 비겁해 보인다. 그나마 전북의 라디오 진행자 중에서 ‘Daum' 인물검색에 나오는 이는 김차동(FM모닝쇼 진행자)와 이백희 뿐이다. 협찬상품이 적은 것은 지역경제규모가 작다보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중앙방송에 사연을 보내 방송될 경우보다 지방방송에서 소개될 확률은 훨씬 높은 기쁨이 있다.
지방방송의 중요성과 스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빼놓을 수 없는 가수들이 있다.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나 전설의 스타 ‘비틀즈’를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고, 특히 ‘배철수의 음악캠프’ 애청자라면 더더욱 잘 알 것이다. 그러면 이들이 지방방송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알고 있을까?
엘비스는 ‘That's All Right’이 담긴 첫 디스크가 지방 방송국에서 소개되면서 좋은 반응을 얻은데 힘입어 두 번째 싱글을 출반한 뒤 비로서 지방클럽을 돌며 순회공연을 다녔고, 결국 1956년 'Heartbreak Hotel'이라는 싱글로 8주 동안 정상에 머물면서 중앙방송에 화려하게 나설 수 있었다.
비틀즈는 영국에서의 폭발적 인기와는 달리 미국 진출에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지명도는 현저히 낮았다. 그러다 1964년초 싱글 ‘I Wanna Hold Your Hand’가 미국 한 지방 라디오 방송국 전파를 탄 뒤로 무섭게 인기를 모으더니 급기야 빌보드 넘버원에까지 뛰어 올랐다.
80년대와 90년대를 풍미한 본 조비 역시 로컬 클럽에서 연주하며 데모를 녹음했는데 그 중 하나인 ‘Runaway'가 지방 방송국에서 히트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밴드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비단 음악뿐이 아니다. 세계적인 ‘오프라 윈프리 쇼’의 주인공 오프라도 고교 시절 미스 ‘화재예방’ 콘테스트에서 수한 한 뒤 지방 방송국에 갔다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후 뉴스 캐스트로 활동했고 지방방송에서 자신의 이름을 단 토크쇼를 제작해서 인기를 끌었다. 결국 이 쇼는 전국 네트워크를 통해 방송되면서 오프리 윈프리를 세계 최고의 부자연예인 반열에 올려놨다. 작은 지방방송국에서 시작된 그녀를 키운 것도 결국 지방방송인 셈이다. 만일 지방방송이 없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뮤지션과 방송인이라고 보면 지방방송은 한 일이 많다.
우리는 사실 중앙방송에 너무나 고립돼 있는지도 모른다. 웃지 못할 일화 하나가 있다. 1998년 지방선거 당시 투표장을 찾은 한 할머니가 선거관리위원회 직원에게 투표용지가 잘 못 됐다며 항의를 했다. 이유는 ‘고건’이 투표용지에 없다는 것이었다. ‘고건’은 당시 서울시장후보였는데 매일 중앙방송이 서울시장 후보 이야기만 하다 보니 생긴 일이었다.
요즘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중앙방송 뉴스는 ‘지방균형발전법’의 개정에 대해서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또 ‘종합부동산세 개편논란’도 빈부의 문제로만 다룰 뿐 지방자치단체 예산에 미칠 심각한 문제는 언급되지 않는다. 이웃집의 살인사건은 중앙뉴스에서 나오지 않지만 나와 아무상관 없는 한강다리 위에 고장 난 승용차 이야기는 매 시간마다 나오고 있다. 이러다보니 우리는 정작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큰 문제는 모른채 중앙방송이 전해주는 소소한 이야기에 더 관심을 갖고 살아간다.
지방의 진짜 비애는 중앙방송을 들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중앙방송에 몰입돼 우리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무관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자본으로 프로모션한 가수와 방송인들만 미디어를 가득 채우고 거대 자본이 만드는 일련의 트랜드에 따라 인식하지 못한 채 조정당하는 ‘미디어 좀비’를 상상해 보자. 우리는 이미 스스로 민주주의를 버리고 짦은 웃음과 유명 연예인과 그들이 제시한 패션과 트랜드에 중독된 ‘미디어 좀비’가 되어 가고 있는 과정일 지도 모른다. 중앙방송과 지역방송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수 백 억 원이 아낌없이 투자되는 중앙방송의 제작여건과 출연료 월 100만원을 이유로 진행자 교체를 수 없이 고민하는 지방방송이 똑같을 수는 없다. 그나마 MBC 김차동, JTV 장혜라, 교통방송 조준모 같은 썩 괜찮은 방송인을 갖은 전북은 행복하다. 시사프로그램만 지역의 뉴스와 문제점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시대에서 시대의 아픔을 함께 고민하고, 행복발전소에서 함께 웃는 것이 살아있는 민주주의다. 소란한 토론장소가 가장 살아있는 민주주의 산실이며 싱싱한 우리의 미래다. 이제 ‘지방방송을 꺼라’는 농담은 없어졌으면 좋겠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해, 그리고 내가 사는 이 고장의 발전을 위해 지방방송을 켜보자.
/시사전문MC, 전주MBC 라디오 '시사전북 오늘' 진행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