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BA!
안녕하세요!
ABBA는 그 유명한 외국그룹이름이 아닌 제가 아버지를 부르던 호칭입니다.
“아빠”라는 애뜻한 호칭을 아버지가 무서워서인지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라는 근업한 호칭도 아닌 그냥 아빠의 반쯤되어 나오는 “아바”라고 부르던 것이 커서도 “아바” 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제삿날이 나가오니 더 아버지께 불효한 것들이 생각나서 사죄하는맘으로 글을 씁니다.
제 아버지는 월남참전용사로 10여년전 고엽제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몸이 많아 아파질 때 까지도 고엽제후유증으로인한 합병증인것도 모르고 사시다가 나중에야 알게되었습니다. 월남전에서 미군이 비행기로 밀가루처럼 하얀 고엽제를 사람이 뒤집어 쓸만큼 뿌렸는데 그 당시엔 그것이 그렇게 사람에게 치명적인 것을 몰랐다고 합니다.
지금도 고향집엔 녹슬 월남참전용사 훈장만이 남아있습니다.
전 아버지께서 월남전에 참전하셨고, 무선통신병으로 참전하셨다가 돌아오신 것 정도로 알고 있었고, 아버지 팔뚝에 새겨진 비둘기부대 문신을 보면서 맹호부대 보다는 그래도 안전한 보직에 계셨나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지로 가는 버스안에서 아버지 친구분이 하시는 말씀이 그 당시 월남전에서 무전기 매고 전투부대 맨앞에서 가장 많이 전사한 사람이 통신병이라고 하면서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온 것은 거의 기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버지 살아계실적에 나는 아버지 속만 썩여 드렸고, “감사해요 아버지!, 고마워요! 아버지, 사랑해요 !아버지 ~, 이런 말한마디 한번 못해드린 것이 너무 후회가 됩니다.
초등학교때 아버지깨서 막노동하시던 공사판에 찾아가서 돈달라고 했던일도,
어느 늦은가을 논에서 추수일하시다가 경운기 밸트에 끼어 손가락이 잘라져서 피나는 손가락을 잡고계시던 아버지께 아프시죠, 어떻하냐고 걱정하는 말한마디를 못해드릴일~, 할아버지,할머니 그리고 4남매 키우는 어려운 생활속에서 아버지가 남의 논빌려 힘들게 농사지어 늦가을에 쌀가마니를 집마루에 쌓아놓을때도 난 속으로 아버지께 “그동안 저희 식구를 위해서 너무 수고 많으셨어요 ! 아버지 ”라고 해드려야지 하고 생각만하고 그말을 못해드린일일~, 아버지께서 가을장마로 벼가 썩는 것을 보며 속상해서 우실때도, 위로의 말한마디 못드린일
가족을 위해 품삯으로 산 쌀봉투가 비에 젖어 구멍이 나서 새는줄모르고 산길을 걸어 오셨던 아버지모습~, 저는 너무 불효자입니다.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께 자식으로 도리를 하나도 못해드린 불효는 생각못하고,
우리집에 없는 남의 집 TV를 왜 보냐고, 그 재밋던 고교야구 중계를 못보게 하고 집에 가자시던 아버지
나의 큰 앞이가 말이빨 같다고 하던 아버지가 야속했고,
내가 아끼던 카세트태잎을 함부로 만지시던 아버지가 야속했고,
내가 힘들 때 금전적으로 안도와주신 아버지가 더 야속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서운했던 일들만 지금도 기억하고 저는 너무 불효자입니다.
아버지 !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께서 저에게 제일 미안하게 생각하시던 일은 제가 월급을 모아서 드린돈으로 소한마리를 사셨는데 그소가 새끼를 낳아서 두세마리로 늘어나서 좋아하셨는데, 광우병 등으로 소값이 폭락해서 결국은 모두 팔아버리고 소키우는 일을 접어버린일을 저에게 늘 미안해 하셨습니다.
지금도 고향집에 가면 뒷마당에 아버지께서 손수지으신 우사가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 소꼴을 주시며, 소똥을 치우시며 늘 좋아하시던 아버지
그 모습이 지금도 우사앞에 가면 떠오릅니다.
아버지 고마워요!
아버지 사랑해요!
아버지에겐 제가 눈에 넣어도 안아픈 자식이었죠!!
저도 이제는 알아요, 내 자식이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지니까요.
아버지가 이뻐하시던 그손자도 이제 커서 결혼했고, 그 녀석은 제에게 효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더욱 아버지께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살아생전에 잘해 드리지 못해드린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후회스럽습니다.
아버지 이런 아들을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 “아바” 가 아닌 , 아빠라고 부르며 사랑한다는 그말을 꼭 해드리고 싶습니다.
아빠!!! 사랑해요 아빠의 귀한 큰아들 몽영이가~~~
(010-2045-0106. 박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