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북 전주에 위치한 호성보육원에 1994년입소 ~ 2006년퇴소 이기간동안 도살장에서12년을 살고, 완전범죄12년이 묻혔다. 도살장12년 완전범죄12년 인권유린 사건에 관해 글을 쓰고있다. 피해자들의 암울했던 시절에 대해, 직접 호성보육원에서 살아온 내가 겪었고 보았고 들었던 것을 이글에 담고자 한다. 전주영아원에서 1살~6살까지 생활하다가 1994년 12월 차를타고 호성보육원에 옮겨지게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에겐 더욱 괴롭고 힘들게 되는 일이 될 줄은 이때는 몰랐다. 입소 첫날 오후쯤에 사무실에 들렸다가 반이결정되고 저녁쯤에 저녁식사를 하러 식당에갔다 식사를마치고 반에들어가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고있는데 선배형 두명이 나한테 오더니 한명은 내두손을 잡고 또한명은 내두발을잡고 들어서 이층으로 데려갔다. 데리고간곳은 이층어느반 방이었다 들어오는순간 나를 아무이유없이 들어다가 맨바닥에 던졌다. 나는 너무아파서 울고있는데 울고있는 내 뺨을 사정없이 선배형이 손바닥으로 쳐 올렸다. 나는 뺨을 부여잡고 더 서럽게 더울었다. 그러자 선배형은 내 머리끄덩이를 잡고 나를 내팽게치듯 나를 다시 바닥에 내던졌다. 나는 바닥에 쿵하는 소리와함께 나가떨어졌다. 선배형은 또 다시 나에게 다가와서 사정없이 양손으로 내 얼굴 부위를 마구잡이로 쉬지않고 쳐올렸다. 금세 내 얼굴은 피범벅이 되었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채,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라고 무릎을 붙잡고 사정해야 비로소 맞는 것이 중단될 수가 있었다. 잠시 동안만 그랬다는 말이다. 구타,폭행은 영원히 계속되었다. 이때부터 입소 첫날때부터 구타와 폭행이 시작되었다. 때리는 선배형들은 아무 꼬투리나 잡아서 때린다. 보육원에서는 빳다로 맞는 일, 폭행구타로 맞는일이 매일 일어났다. 보통 하루도 안 거르고 맞는다. 그리고 ‘인간 샌드백’ 이라는 것이 있다. 흔히 권투시합에서 상대를 코너에 몰아넣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이야, 저거 완전 인간 샌드백이구먼?” 이라고들 말한다. 내가 말하는 인간 샌드백은 그것과 차이가 난다. 우리가 당했던 인간 샌드백은, 열중쉬어를 시켜놓고 움직이면 다시 맞아야 하는, 말 그대로 인간 샌드백이라는 것이다. 명치나 복부를 맨주먹으로 있는 힘껏치는데, 우리는 절대로 막거나 피하면 안된다. 명치에 잘못 맞아 숨이 끊어지더라도 우선 때릴 때는 무조건 맞아야만 한다.
무릎 꿇고 손바닥을 허벅지 위에 붙인 채 맞아본적이 있는가? 때리는 힘의 강도는 빳다로 맞을 때와 같다. 어리든 나이가 많든 상관없이 똑같은 힘으로 맞았다. 그런 자세에서 몽둥이로 손바닥을 맞으면 손은 별로 아프지가 않다. 그런데 허벅지 앞으로 전해져 오는 고통은 말로다 표현할 수 없다.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 한번은 소리 내서 울고있는데, 나와 같이 맞은 사람이 나에게, “야! 지금은 아프더라도 참아라.” “너 하나 때문에 전부 다시 맞을수 있으니까, 참아라” 라며, 자기도 무지 아프면서도 이를 꽉 깨문 채 나에게 아픔을 참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던 게 잊혀지지 않는다.
사회 사람들이 ‘이불말이’ 라고들 하는 것을 보육원에서는 ‘모다구리’ 라고 불렀다. 진짜로 혼자서 잘못했거나 선배형들 눈에 잘못 걸렸을때 주로 당했다. 담요가 머리 위에 덮이는 순간 몸을 최대한 웅크리지 않으면, 장이 파열되거나 팔 다리가 부러질 수 있다. 머리가 깨지는 상처를 입게 될 수도 있다.
마구잡이식으로 선배형들이 때릴 때도 있는데, 이런 경우 대부분 선배형들이 때리는도중 이성을 잃을 정도의 극한 흥분 상태에 이른다. 욕이란 욕을 해대면서 그냥 막 밟아대고 몽둥이로 두들겨 팬다. 머리를 잡은채 땅바닥에 갖다 박는다. 이럴때는 때리던 선배형의 분이 먼저 풀리든지, 아니면 맞는쪽이 기절을 하든지 해야 끝이난다. 내가 생활하면서 겪은 바로는, 선배형의 분이 먼저 풀렸던 적은 없었던것 같다.
우리는 기합을 받는 것보다 잠깐의 고통으로 끝나는 빳다 맞는것을 선호했다. 왜냐하면 기합은 1~2시간 내내 고통을 참아야 하지만, 빳다 같은 경우에는 척추나 인대쪽에 잘못맞지 않는이상 그순간의 고통만 참아내면 되기 때문이다. 선배형들이 “빳다칠까, 기합갈까?” 하면,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빳다를 맞겠습니다!”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야구선수들이 배트를 휘두르는 강도의 힘으로 빳다를 맞고나면 엉덩이와 허벅지에 피멍이 들어있어 서로 바세린을 발라준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어느날은 선배형들한테 몽둥이로 단체로 맞고있는데 남자직원 선생님이 나타나서, 선배형들이 후배들을 몽둥이로 때리는 장면을 보고도 선배형들한테 “더 때려라 군기 제데로 잡아라” 이런말을 하면서 맞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맞는것을 말려야할 남자직원 선생님이 어떻게 이럴수가 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이게 사회복지사 선생님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 선배형들은 어느날 보육원생들을 전부 집합시켜놓고 원생들끼리 싸움을 강제로 시키기도했고, 거의 매일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다. (일종의 시다바리 였다.) ‘타작’ 이라는 용어가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맞아라. 그냥 기합을 받으라는 의미가 더 많다. 매일 때리고 매일 엄청난 기합을 줬으면서도, “많이 봐줬지? 오늘 타작 한번 하자.” 라고 말했다. 선배형의 명령이 떨어진다. “일렬로 전부 벽에 붙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리는 1~2초 만에 벽앞으로 일렬로 붙어 선다. 그리고 간단하게 전부 빳다 3대씩을 맞고 다음 명령이 떨어질때까지 기다린다. “히로시마 타!” 순간 선배형의 명령이 떨어진다. 우린 일사불란하게 벽쪽에 배를 붙인채 물구나무를 선다. 똑바로 못하고 휘청휘청대면 바로 선배형의 무릎이나 몽둥이가 몸으로 날아온다. 물구나무처럼 시선이 밑으로 향해 있을때 선배형들이 어디를 때릴지 모르는 공포감이란 표현할 방법이 없다. 보육원 안에서 받았던 기합의 명칭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룻배’라는 기합은 요즘 잘 알려진 복부 운동할 때 모습과 비슷하다. 머리와 발뒤꿈치는 바닥에서 15센티미터 정도 들고, 두팔은 앞으로 쭉뻗는다. 그런 자세로 두발은 붙인채 굽히면 안되는, 허리 힘으로 누워서 받는 기합이다. 나룻배 자세에서도 발바닥을 매일 맞는다. ‘전깃줄’이라는 기합은 두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고 두손을 어깨 너머로 젖히면 몸이 뒤로 젖혀지는데, 이때 양손 엄지손가락 2개로 벽을 지탱하는 자세다. 단체기합 중에서 ‘한강철교’를 빼놓을 수가 없다. 열댓명이 한강철교를 만드는 것이라면 그다지 어렵지 않겠지만, 50여 명이 나누어 한줄의 한강철교를 만들면 정말 죽을 맛이다. 엎드려뻗쳐 자세에서 두다리를 뒷사람 등위로 올리는 자세인데, 팔다리가 짧은 아이들도 있고 반대로 긴 아이들도 있다. 그러다보니 자세잡기가 힘들었다. 그위로 선배형들이 밟고 올라가서 걸으면 우리는 팔과 허리에 온힘을 실어 선배형들이 떨어지지 않게 중심을 잡아야만 했다.
또한 고문중에 물고문 이라는것을 빼놓을수가 없기에, 여기 별도로 적는다. 선배형이 나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군기잡는다는 이유로 화장실로 끌고갔다. 팬티까지 모두 탈의시킨 다음 손과 발을 묶었다. 하필 겨울이라서 너무나 추웠다. 선배형은 아무말없이 내뺨을 후려쳤다. 난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그런나를 선배형은 발로 밟아대고 찬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맨몸 위에 차가운 물을 사정없이 뿌렸다. 온몸이 찢어질 듯 탱탱하게 긴장되어 왔다. 찬물이 너무 아파서 춥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온몸이 새파랗게 변했다. 나는 묶인 몸으로 선배형에게 매달려, “제발 한 번만 살려 주세요” 라고 수십 차례 통사정을 했다. 겨우 물고문이 끝났다. 얼마동안 차가운 물을 뒤집어 썼는지는 몰라도, 꼭 시간이 멈춘 듯했다. 엄청난 공포의 느낌이 들었다. 정말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어린 나이에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었다. 그뒤로도 추운겨울에 여러번 물고문을 당했다. 이런 일을 겪은 후로 나는 아직까지 한여름에도 찬물로는 샤워를 못한다.
악몽과도 같고 지옥과도 같은 보육원의 생활은 어린내게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보육원에서는 안되는게 없다. 안되면 기합받고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선배형들로부터 구타,폭행(기합) 당한것을 직원선생님한테 말했다는 이유로 엄청 죽도록 맞은적이 있었다. 죽도록맞고 직원선생님한테 선배형들로부터 맞은것을 말을해도 소용이 없다는것을 느껴서 그뒤로 선배형들한테 맞은것을 직원선생님한테 말한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있으나 마나한 선생님들이었다. 선배형들한테 기합받거나 구타폭행을 당할 때 선배형들이 우리에게 했던 말들이 기억이난다. “이 호로 새끼가 죽을라고, 이리와!” “이 새끼, 좆나 말 안 듣네!” “좆까고 자빠졌네. 이리 안 와 시발놈아?” “대가리 쪼개기 전에 일루 와!” “아주 개지랄을 하네.” “좆같은 새끼가 어디서 개겨?” “똥구녕을 등짝까지 째기 전에 말 들어라 새끼야!” “이런 개새끼, 시발 새끼가 죽을라고?” “아주 반만 죽여줄게.”이런 말들이 우리는 기합을 받으면서 두들겨 맞는 입장에선 그 욕 자체가 우리에겐 공포였다.
남자직원 선생님은 원생들이 잘못했다는 이유로, 군기잡는다는 이유로, 우리 원생들을 여러번 쇠파이프나 나무몽둥이로 엉덩이와 허벅지에 피멍이 들도록 때리고, 기합을 줬었다. 때리는 장소와 기합받는 장소는 강당과 도서관이었다. 어느날은 이런일도 있었다. 남자직원 선생님은 우리 원생들을 나무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리다가 나무 몽둥이가 끊어지면 또 다른 나무 몽둥이로 원생들의 엉덩이를 남자직원 선생님의 분이 풀릴때까지 때리기도 했었다. 맞고나면 허벅지와 엉덩이에 피멍이 들어있어서 서로 바세린을 갖다가 발라주곤 했었다.
외부에서 감사나오거나 손님들이오기 하루전에 남자직원 선생님과 여자직원 선생님은 보육원생을 전체 집합시켜놓고 원생들에게 “내일 손님오니깐 이상한 소리했다간 알아서들 해라 무조건 잘해준다고 해라!” 이런씩으로 입단속을 시켰다. 남자직원 선생님과 여자직원 선생님은 외부 손님들과 보육원생들과 자유롭게 접촉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보육원내 성폭력, 성추행도 있었다는게 소문이나고 그랬었는데 소문들이 전부 사실이었고, 나는 보육원에 있으면서 성폭력,성추행 장면을 직접 목격하기도 하였고, 성폭력,성추행을당한 피해자로부터 피해 내용을 듣기도 하였다. 나또한 성추행,성폭행을 당한적이 몇 번 있었다. 보육원측은 성폭력,성추행을 은폐해 왔다. 보육원 원장님은 횡령,비리가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2008년 여름에 호성보육원에서 생활했던 나보다 2살많은 형을 사회에서 만난적이 있었다 그때 만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형이 나한테 하는말이 현재 호성보육원에서 근무중인 여자직원 선생님이 현재 근무중이신 원장님과 함께 시청에갔는데 원장님이 쓰지도 않은 돈을 어디에 쓴것처럼 허위로 싸인 했다는것을 목격했다고 하였다. 원장님은 돈을 횡령하여 우리 원생들한테 써야될 돈을 쓰지 않았고, 우리는 거의 매일 똑같은 반찬,국을 먹어야 했고, 매일 똑같은 옷을 입어야했고, 겨울에는 따뜻한물도 나오지 않았고 난방도 되지 않은채, 춥게 보내야만 했다.
나는 보육원 사건이 해결되어야만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 이 일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나는 앞으로도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게 될것이다. 보육원에서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살다보니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변해가면서, 그후유증으로 현재 공황장애, 불안장애, 우울장애로 몇 년동안 정신과약을 하루에 4번 복용하고있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내몸에 공황장애, 불안장애가 심하게 증상이 나타나면 응급차를타고 응급실에 여러번 왔다갔다 하면서 진료를 받은적이있고, 병원에도 여러번 입원한적이 있었다. (최근에는 몸이 너무 아파서 6월달에 입원하여 퇴원 한적이 있었다.) 내 몸은 거의 불안 증세가 나타난다 그럴때면 병원에서 안정제를 처방해준약을 먹기도한다 이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으면 바로 응급실에가서 진료를 받는다. 현재나는 몸이 아파서 아무일도 할 수가 없어서 기초생활수급자다. 정부에서 나오는돈으로 생활을 하고있다.
보육원 인권유린 사건으로 인해, 지금도 악몽이되어 몇 년째 기억속에서 되풀이 되고 있다. 길고긴 고통스러운 기억을 완전히 끝내고 사람답게 살고싶다. 밤에도 불안증상이 나타나 잠이 안올때면, 안정제와 수면제를 동시에 먹고 10분정도 눈감고 누워있으면 서서히 잠이 온다. 이 사건이 인권유린의 사건임을 지금도 알 만한 사람은 알 것이다. 제데로 된 법치국가라면 피해자가 겪고 있는 고통의 반만이라도 가해자가 죄를 씻을 수 있도록 벌을 내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피해자들에겐 평생의 고통을 짊어진채 살아가도록 한 이 사건이야말로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아닌가? 이대로 진실을 묻어둔 채 살아야만 하는가? 오래 묵혀 둔다고 해서 좋은 장이 되지 않듯이, 좋지 못한 일로 피해자가 생긴 일이라면, 그리고 피해자들이 아직 살아 있고 살아가는데 문제가 있다면, 더 이상 묻어 두지 말고 공론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누구도 보육원 사건에 책임지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간다면 이런 일들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서 무관심해서 보육원 내에서 발생한 구타폭행, 아동학대, 성추행성폭행, 강제노역, 횡령비리 의 인권유린 사건은 단 한 번도 세상에 드러난 적 없이 결국 완전범죄12년이 묻힌 것이다.
난 혼자 있을 때면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이대로 이렇게 죽기엔 너무 억울한데···...진짜 내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진짜 죽게 된다면? 보육원에서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남은 것이 너무 억울한데···...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아무도 보육원 사건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다면 이 사건은 완전범죄가 될 수가 있다. 정신적으로 얽히고설킨 지난 과거, 아직 진행되고 있는 이 악몽과도 같은 실타래를 풀어줄 사람의 도움이 나에게 절실하다고 난 느낀다. 나는 보육원에서 당했던 것들을 다시 떠올리며 쓰다 보니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나는 절대로 억압적인 보육원의 삶을 원하지 않았다. 결코 원한적 없는 삶을 억지로 살아야 했다. 모든 것을 끄집어내려 노력했지만, 그러지 못한 내 기억이 안쓰럽다. 머리가 기억하는 것과 무의식중에 몸에 배어 버린 기억···...이것들의 10분의 1 정도밖에 난 쓰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조금씩 흐려진다. 지워지려면 한꺼번에 싹 지워졌으면 하는데, 그렇게는 되지 않아 괴롭다. 나는 아직 대한민국 어딘가에 내가 있던 그 보육원과 같은 곳이 또 있을 것 같아 지금도 두렵다. 상처받은 이에게 동정도 필요하지만, 그전에 예방을 위한 대책이 먼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선동정 후대책’이 아닌, ‘선대책 후동정’을 해달라.
이 글을 쓰면서도, 더 쓸 글이 많은 것 같은데, 보육원에서 겪었던 일들을 다시 떠올리며 쓰는게 이렇게 힘든 것인지 몰랐다. 이곳에 쓴 모든 글들은 내가 겪었던 일들의 일부일 뿐이다. 간절히 원하는 것은 호성보육원 에서의 인권유린 사건을 책임을 지고 시설장이 교체되어야 한다는것! 호성보육원 에서의 인권유린 사건을 바로잡아,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 나는 이런 바람으로 이렇게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