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8(화) 책방에 가다

오늘 소개해주실 책은요?

출간되기 무섭게 벌써 4500부를 찍은, 지금 가장 핫한 시집 한 권을 소개합니다. 

신춘문예판을 그야말로 휩쓸어놓은 이원하 시인의 등단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이라는 제목의 시집입니다.

 

시인은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당시 “거두절미하고 읽게 만드는 직진성의 시”라는 평가와 함께 심사위원 만장일치의 의견을 받았는데요. 

당선 직후 문단과 평단, 출판 관계자와 독자들에게 화제가 되면서 첫시집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은 신인 중 한 명으로 손꼽혔죠. 

 

아무리 새로운 시를 뽑는 신춘문예라 해도 어느 정도 패턴과 분위기가 정형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원하 시인은 이런 시라는 고정관념을 발로 차는듯한 시, 계속 읽게 만드는 재밌고 개성 넘치는 시를 써서 특별한 것 같습니다. 

시는 천진성이랄까, 남의 눈치를 볼 줄 모르는, 그래도 할 말은 솔직하게 다하고 있는 독특한 리듬감을 잘 살리고 있는 시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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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제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저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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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국문이나 문예창작을 전공하지 않고 미용고를 졸업해 미용실 스태프로 일하고, 영화 보조 연기자로 살아온 이력도 한몫했습니다. 

이십대 중반에 문학을 만나 시를 쓰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가 살았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나 당선작과 같은 제목으로 나오는 첫 시집을 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