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MBC 자료사진]
“고시히카리, 오대, 조명1호, 조영, 해담쌀, 해들, 해품, 알찬미, 삼광, 새일미, 새청무, 신동진, 영진, 안평, 영호진미, 일품, 참드림, 추청, 친들, 동진찰, 백옥찰, 강대찬, 참동진..”
정부가 보급을 책임지는 쌀 품종들입니다. 모두 23개입니다. 실제 출원된 볍씨는 더 많습니다. 650여 개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거의 대부분은 선택받지 못한 종자들입니다.
국가의 선택적 품종 정책은 그래서, 국민의 ‘밥상머리’를 직접 간섭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은 정부가 골라주는 볍씨로 농사를 짓고, 그 쌀로 밥을 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자 관리에 중대한 임무를 띤 국가기관에서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국립종자원 창고에 보관하던 볍씨에서 곰팡이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 볍씨 300톤 오염, 왜 ‘신동진’만?
올해 모내기철을 앞두고 300톤이 넘는 물량이 보급에 차질을 빚게 됐습니다. 벼농사를 짓는다면 여의도 7개보다 넓은 면적을 채울 수 있는 양입니다.
지난해 12월 발생한 일이지만, 취재를 통해 지난달에야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볍씨들에서 싹이 얼마나 제대로 트는지 알아보는 발아율 검사에서 기준치(85%)를 밑도는 수치가 나온 것입니다. ‘진균’ 때문이었습니다. 곰팡이란 뜻입니다.
이 사태에서 공분을 산 부분은 따로 있었습니다. 지난달 14일 최초 보도에서 상당수 댓글 반응은 ‘왜 하필 신동진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곰팡이 피해가 특정 볍씨에 집중된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그만큼 ‘관심을 받는 종자’라는 방증입니다. 문제가 발생한 국립종자원 전북지원 창고에는 모두 여섯 가지(신동진, 참동진, 안평, 동진찰, 해담쌀, 해품) 볍씨를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 곰팡이 사태가 소환한 ‘졸속퇴출 논란’
사실 신동진은 오는 2027년 퇴출 방침이 정해진 종자이기도 합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해부터 ‘쌀 적정생산대책’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쌀이 남아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벼 재배면적을 줄이고, 콩·가루쌀 등 대체작물 재배면적은 늘리겠다는 겁니다. 재배면적 1위, 신동진이 희생양이 됐습니다.
정부의 큰 그림에서 신동진은 ‘없어져야 하는 쌀’이었습니다. 퇴출하기로 한 결정적인 사유는 ‘쌀알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이유였습니다. 과거 벼 재배시험에서 단위면적(10a, 약 300평) 당 생산량(596kg)을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퇴출 기준으로 삼은 생산량 570kg보다 많습니다.
퇴출을 못 박은 시점은 오는 2027년입니다. 종자 중에서도 순도가 가장 좋은 ‘원원종’을 관리하지 않고, 농가에 종자 보급도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씨를 말리는 셈입니다.
바로 그 연장선에서 ‘곰팡이 사태를 일부러 발생시킨 것 아니냐’는 의심이 나옵니다. 물론 그렇게 볼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있습니다.
신동진 퇴출이 졸속으로 추진됐다는 논란 탓입니다.
■ 신동진은 진짜 ‘다산(多産)벼’인가?
신동진이 받는 ‘다산 의혹’부터 따져볼 대목이 한둘이 아닙니다. 신동진의 생산단수 596kg은 지난 1999년 시험 재배를 통해 산출된 값입니다. 그런데 그사이, 벼농사 관행에는 결정적인 변화가 생겼습니다.
바로 재배법의 표준이 바뀐 것입니다. 농정당국은 수량과 품질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질소비료를 2kg ‘적게’ 쓰도록 했습니다. 질소비료를 적게 쓰면 쌀 생산량이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바뀐 재배법을 신동진에 적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지난 2020년 농촌진흥청은 바뀐 재배법을 적용해 신동진의 생산단수를 계산해 봤습니다. 결과는 536kg이었습니다. 퇴출 기준 570kg에 한참 미달했습니다. 정부가 틀린 수치를 근거로 정책을 수립한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출 방침은 끝내 뒤집히지 않았습니다. 신동진의 생산단수는 여전히 육성 당시인 1999년도에 머물러 있습니다. “처음에 값이 그렇게 등록되면 법적으로는 바꿀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신동진 농가는 퇴출방침에 여전히 반발하고 있습니다.
■ 참동진 밀어붙이면 그만?
정부는 퇴출벼인 신동진의 대체재로 ‘참동진’을 밀고 있습니다. 유전적 유사성도 96%가 넘을 정도로 닮은 꼴입니다. 국립종자원도 참동진 물량이 충분해 신동진 곰팡이 사태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참동진으로 대체하려는 이유가 없진 않습니다. 지난 2021년 전북 지역에선 대규모 병해충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전체 피해의 84%가 신동진 재배면적이었습니다.
참동진은 신동진의 내병성을 강화한 개량 품종입니다. 재작년에는 ‘올해의 국가연구개발 100선’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올해부터는 정부보급종으로 선정됐습니다.
참동진은 그런데, 철저하게 농심의 외면을 받고 있습니다. 연초까지 국립종자원이 수요조사를 벌인 결과, 농가들의 참동진 종자 신청량은 전체 공급계획 물량의 33% 수준인 264톤에 그쳤습니다. 올해도 어김 없이 신청이 쇄도한 신동진과는 대조적입니다.
이유는 뭐니 뭐니해도 ‘돈’ 때문입니다.
농부의 쌀은 RPC(Rice Processing Complex, 미곡처리장)가 수매하면서 비로소 부가가치를 창출합니다. 그리고 RPC는 그 쌀을 포장 가공하는 상품화 과정을 거쳐 유통업체에 넘깁니다. 이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많은 소비자 입맛을 사로잡은 쌀이 브랜드가 됩니다. 신동진은 바로 품종명으로 모든 게 설명되는 대표적인 ‘브랜드 쌀’입니다.
브랜드는 값으로 증명됩니다. 지난해 전북자치도 조사 결과, 복수의 RPC들이 신동진에 매긴 수매가는 6만 7천 원(40kg 조곡 기준)에 달했습니다. 대부분 일반벼보다 2~3천 원에서, 많게는 최대 7천 원을 더 쳐준 겁니다.
참동진의 시장 반응은 어떨까요? RPC 수매가는 지역별로 달랐지만, 6만 2,000원~6만 4,500원의 가격대를 형성했습니다. 아무래도 돈이 더 되는 신동진을 키우는 게 이득일 수밖에 없습니다.
■ 누가 원하는 신동진인가?
취재 과정에서 복수의 신동진 재배 농가들을 만났습니다. 여러 농업인 단체 관계자들로부터는 의외의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습니다. “신동진을 포기하고 싶다”는 말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키우는 난이도가 높다는 겁니다. 쌀알 굵고 맛도 좋은 것으로 잘 알려졌지만, 재배의 관점에선 쌀알이 그만큼 무겁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키도 커서 비바람에 더욱 취약하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품질관리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정부 퇴출 방침에 곰팡이 사태까지 겹쳤으니 신동진 포기하겠다는 농민은 못 봤습니다.
소비자가 찾는 쌀이 유통업계가 찾는 쌀이고, RPC가 원하는 쌀이며, 곧 농가가 원하는 쌀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일 것입니다.
국립종자원에서 발생한 곰팡이 사태는 그 자체로 충격을 안겼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정부의 일방통행 농정대책에 더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하고 있습니다.
자료출처: 전북자치도, 국립종자원 전북지원 등